역사적 이야기

스트립티즈의 역사: 1917년 무대 위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되다

스트립티즈의 역사: 1917년 무대 위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되다

1917년, 뉴욕의 작은 극장 내셔널 윈터 가든(National Winter Garden)의 관객들은 익살스러운 개그와 매력적인 댄서, 그리고 독백으로 채워진 또 한 번의 예술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남성 관객이 대부분이던 객석은 코미디언 메이 딕스(Mae Dix)의 공연과 마주하게 됩니다. 의상 유지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이 여배우는 아무렇지 않게 드레스의 깃을 뜯어냈고, 무대 위에서 벌어진 이 행동은 객석의 남성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눈치챈 메이는 소매 커프스마저 떼어내고 드레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순한 제스처는 결국 연예계에서 가장 인기 있으면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공연 장르, 바로 스트립티즈(strip-tease)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극장의 주인이었던 민스키 형제(Minsky brothers)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메이는 이후 '도발적으로 옷을 벗는' 정기 공연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풍기 단속의 시대, 버레스크 극장의 생존 전략

그러나 미국에서 탄생한 이 공연은 도덕성 강조와 이른바 '음란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이 만연했던 한 세기 직전에 등장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말부터 소위 버레스크 극장(burlesque theater)은 은근히 외설적이고 도발적인 농담이 오가는 대중적 볼거리였습니다. 당시 예술 감독들은 당대의 풍습과 법률을 명백히 침해하지 않기 위해, 무용수들의 짧은 의상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그리스·로마 극장 무대의 '충실한 재현'을 내세웠습니다.

이런 자극적인 쇼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통로는 바로 탁블로 비방(tableaux vivants, 살아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모델들이 고전 회화를 재현하고 고전적인 장면을 연기하는 이 형식에서, 움직임 없이 몸을 드러낸 모델들은 미술이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대중을 '교육'한다는 명목을 내걸었습니다. 가장 많이 무대화된 작품 중에서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 재현이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유럽의 엄격한 검열과 저항하는 무대

유럽 대륙에서도 엄격한 도덕 기준은 스트립티즈의 대중화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경직된 도덕 기준은 배우가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의상까지 꼼꼼히 검열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이 기준을 처음으로 돌파한 이는 영국 극단을 이끌던 리디아 톰슨(Lydia Thompson)이었습니다. 그녀의 쇼에서 댄서들은 나체의 착시를 일으키는 피부에 밀착되는 의상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같은 시기, 캉캉(cancan) 공연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이른바 '스커트 댄서'들도 등장했습니다. 동시에 유명한 오리엔탈 댄서들은 서구인의 눈에 이색적으로 보이는 춤 동작에서 영감을 받은 쇼를 선보였으며, 벨리댄스 역시 아랍 공연이 지닌 문화적 의미를 남성 관객의 시선에 맞춘 볼거리로 전환시키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단순한 노출이 아닌, 창조적 연극성

버레스크 극장에서 메이의 무심한 행동은 더욱 창의적이고 연극적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 제시카 글래스콕(Jessica Glasscock)은 스트립티즈가 여성 신체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노출에 머물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스트립티즈에는 웃음과 도발, 노출이 뒤섞이면서도 관객과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세 가지 요소의 삼각 구도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대에 담긴 창의성은 글래스콕의 견해를 방증하는 듯합니다. 일부 무용수들은 공연 중 훈련된 새들이 날아다니며 자신의 몸을 덮는 형태로 등장했고, 다른 이들은 하나씩 터뜨려야 하는 풍선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런 공연이 성행하면서 결국 불온한 공연을 규제하는 새로운 법률 제정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성혁명과 함께 찾아온 부활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그리고 1960년대의 성혁명(sexual revolution)과 함께 스트립티즈 쇼는 부활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이른바 '핀업(pin-up)'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베티 페이지(Bettie Page)입니다. 오늘날 핀업은 현대 사회의 행동을 오랫동안 규율해 온 도덕 기준에 맞선 여성의 성취를 되새기는 일종의 '리바이벌'을 상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