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군농분리(兵農分離)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태합검지, 칼 수거(刀狩), 신분 통제령처럼 개인의 신분을 확정하는 정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초를 먼저 마련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이며, 이를 히데요시가 발전시키고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완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군농분리가 왜 필요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노부나가의 군농분리 구상
노부나가 이전에는 무사와 농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무사들이 촌락에 거주하며 평소에는 스스로 농사에 종사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징집되어 싸우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농번기에는 병력을 동원할 수 없어, 원할 때마다 전투를 벌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부나가는 농번기와 상관없이 언제든 장기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을 성에 상주시키면 이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노부나가는 금전으로 병사를 고용한 상비병(용병)을 성에 주둔시켰습니다. 또한 자신의 가신들에게도 성거주를 요구하여, 농번기에 발목 잡히지 않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상비병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노부나가 특유의 전투 방식 때문입니다.
노부나가의 전술은 창과 철포(화승총)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작전이었는데, 이는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필수로 요구합니다. 특히 철포 같은 신식 무기는 전문적인 군사 훈련 없이는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센고쿠 다이묘에 앞서 철포 같은 신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고, 이를 활용한 혁신적인 전술로 승리하려면 이를 전담할 전문 병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만 초기에는 노부나가 군 내에서 상비병의 비중이 크지 않았습니다. 농번기에 싸운 기록이 적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군농분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나가시마 잇코잇키 진압 이후, 오다 영내에 적과 접촉하지 않는 안정된 영지가 어느 정도 확보된 때부터로 보입니다.
이러한 전례 없는 군제 개혁을 통해 노부나가 군은 센고쿠 시대 최고로 조직적이고 전술적인 군대로 불리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 수거령(刀狩令)
이 제도는 혼노지의 변 이후 도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계승됩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밭을 버리고 용병이 되는 사례가 늘면서 농업 종사 인력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용병이 된 옛 농민들을 다시 촌락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종사하게 하고, 농민들이 더 이상 밭을 떠나지 못하도록 무기를 대대적으로 걷어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 수거(刀狩)입니다.
동시에 태합검지도 시작되었습니다.
검지(検地) ⇒ 농민 통제와 연공(年貢) 징수를 목적으로 하는 토지 조사
태합검지에서는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경작지를 배정함으로써,
- 군농분리를 완성하여 병사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도록 함
- 무사를 촌락에서 떼어내 성으로 이주시킴
또한 히데요시는 1591년 신분 통제령(人掃令)을 반포했습니다.
신분 통제령 ⇩
무사가 상공업자나 농민으로 전업하는 것, 농민이 상공인이나 장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이를 통해 호수와 인구를 조사하고, 무사·상인·농민 등 직업별로 신분을 확정했습니다.
그 결과 각 개인의 신분은 임의로 변경될 수 없게 되었고, 신분 질서가 명확히 확립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정권 아래의 군농분리
도쿠가와 정권 아래에서 막부는 군농분리를 한층 교묘하게 추진합니다.
무사들은 성시(城下町)에 모여 살게 되었고, 무사들에게 갑옷과 생필품을 공급하던 장인과 상인들 역시 성시로 이주했습니다. 이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었습니다.
이는 전투의 전문가인 무사를 하나의 계급으로 고립시켜 막부의 통제 아래 두고, 농민은 생산 활동에만 종사하게 만들기 위한 설계였습니다.
에도 초기의 이러한 조치들은 세상이 다시 난세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정리
- 그때까지는 평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전시에 소집해 싸우는 방식이었기에 농번기에 전투가 불가능했습니다. 무사와 농민의 노동을 분담시킴으로써, 무사는 일상적인 훈련에 매진하고 농민은 농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농민에게서 무기를 거두어 반란을 예방하고, 밭을 버리고 용병이 되는 현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 무사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사와 농민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무사가 농민 위에 서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 에도 시대에는 무사와 농민이 분리되었고,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까지 분리되었습니다.
특히 히데요시는 스스로 농민 출신이었기에 농민의 힘과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렇기에 이런저런 관련 정책을 많이 펼친 것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