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오닌의 난: 11년간 이어진 공허한 전쟁, 전국시대의 서막이 되다

1467년, "인간 세상이 텅 비었다"는 말로 유명한 오닌의 난.

하지만 이름만 앞서고 내용이 뒤따르지 않는 법. 오닌의 난이 어떤 혼란이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11년간 지속된 오닌의 난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보다 컸던 천하 분열!?

천하를 가르는 전투라고 하면 모두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꼽습니다.

그러나 오닌의 난의 규모는 세키가하라 전투보다 더 컸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정확히는 약 6시간 만에 승부가 났습니다.

반면 오닌의 난은 무려 11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교토의 거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래서 탄생한 말이 바로 "인간 세상이 텅 비었다"입니다. 언어유희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딱 맞는 표현이죠.

긴 세월 동안 무로마치 막부는 기울기 시작했고, 각지의 다이묘들은 실권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오닌의 난이 "전국시대"의 도화선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초유명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닌의 난은 왜 일어났나?

간단히 말해 "막부 실권을 둘러싼 싸움"입니다.

아시카가 막부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은각사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 사람은 정치보다 차(茶) 같은 취미에 빠져 도피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만큼 불쌍한 면도 있습니다. 아내는 마귀 같은 신부였고, 측근들은 모두 쇼군을 제치고 멋대로 정치를 하는 인물들이었으니까요. 사실 요시마사도 처음에는 의욕이 있었지만, 점차 지쳐버렸습니다. 쇼군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요시마사는 29세 때 쇼군 자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요시마사는 이렇게 결심합니다.

"승려가 된 친동생을 불러와 후계자로 삼자!"

동생은 "형님! 저는 아직 어리니까, 곧 후계자가 태어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은퇴하고 싶었던 요시마사는 "안 돼, 이제 못 하겠어. 후계자가 태어나도 쇼군 자리는 네 것이니 부탁한다!"라고 강요했고, 결국 동생은 마지못해 쇼군 후계로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바로 다음 해, 친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당연히 아내인 히노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게다가 막부뿐 아니라 막부 최고위 가문이었던 하타케야마씨 집안에서도 가독(家督) 상속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가문의 후계 문제는 일상다반사였죠. 모두가 1등 자리를 원했으니까요.

결국 아시카가 막부의 주력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각각 진영을 이끌며 일본이 "동군 대 서군"으로 갈라져 11년간 싸우게 됩니다.

오닌의 난이 "집안 소동"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참으로 성가신 이야기죠.

1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오닌의 난: 11년간 이어진 공허한 전쟁, 전국시대의 서막이 되다

1467년 5월, 오닌의 난이 시작됩니다!

쇼군 요시마사는 초기부터 "화해해라!"라고 명령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병사들이 몰려들면서 교토는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교토 시내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적이 도망치기 전에 미리 불을 질렀기 때문에 이미 지옥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요시마사는 동생을 출가시켜 물러나게 했고, 반대편인 서군은 동생을 새 쇼군으로 옹립했습니다. 적과 아군이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토에서 싸우던 각 다이묘들의 본거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 전역이 전장으로 변해갔습니다.

6년 후, 유행병이 돌면서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잇달아 병사합니다.

두 사람의 죽음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야마나가 카츠모토를 암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습니다.

이후 소젠과 카츠모토의 아들들이 화해하여 동군이 되었지만, "동군 대 서군"의 구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규모 충돌은 끝없이 이어졌고, 언제 끝났는지조차 잊혀질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이 고통받는 동안에도 쇼군 요시마사는 연회에 빠져 살았고, 마귀 같은 아내는 동군과 서군 양쪽에 돈을 빌려주며 이익을 챙겼습니다. 정말이지 이 부부란!

10년경부터 화평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서군의 영주들이 하나둘 영지로 돌아가면서 서군은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수십만 병사가 교토에서 싸웠는데도 주요 장수는 전사하지 않았고, 전후에 처벌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패자가 영지를 몰수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등 엄중한 처벌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왜 싸움이 일어났는지, 누구를 위해 싸웠는지도 모른 채 오닌의 난은 11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맺음말

오닌의 난 이후 막부는 재정 재건으로 회복을 시도했지만, 요시마사는 백성 구제에는 힘쓰지 않고 동산(東山)문화와 은각사 같은 취미에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만약 요시마사가 쇼군이 되지 않았다면 오닌의 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국시대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기 때문에 아시카가 막부가 멸망하는 미래는 변하지 않았겠지만,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가 탄생하는 과정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던 셈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 의미 없는 충돌이었던 오닌의 난입니다.

많은 중요한 사료들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요시마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