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의 정책과 전술은 시대를 한 걸음 앞서간 것으로 평가받곤 합니다.
철포(화승총)의 활용, 낙시낙좌(樂市樂座), 관소(關所) 폐지, 석벽을 활용한 성곽 축조, 천수각 건립, 병농분리, 거점 이동 등 노부나가의 정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사실 이들 대부분은 다른 다이묘가 먼저 시행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오다 가문은 철포를 비교적 일찍 도입한 편이지만, 특별히 빠르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케다 신겐은 총보다 기병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1555년 무렵 이미 국경 지대의 성에 철포 300정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무렵 노부나다는 가독을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으로, 성을 기요스로 옮긴 직후였습니다.
아즈치성도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롯카쿠 사다요리의 '두 번째 우림'?!
노부나가 하면 아름다운 천수와 석벽을 자랑하는 아즈치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천수의 원형은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세운 시기산성과 다몬야마성이며, 석벽을 활용한 축성은 오미의 롯카쿠 가문의 관음사성(觀音寺城)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음사성은 도로에서 보이는 쪽은 석벽으로, 보이지 않는 곳은 흙벽으로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아즈치성 역시 곧게 뻗은 계단처럼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구조 덕분에 노부나가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고 여겨집니다.
영지 경영과 정책도 각 다이묘들의 장점이었던 것들
차도(茶道)를 활용한 정치 역시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전매특허였습니다. 차 도구를 매개로 사카이와 교토의 상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정보를 수집하던 그의 방식을 노부나가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낙시낙좌 역시 롯카쿠 사다요리가 더 먼저 시행했으며, 이마가와 가문 역시 같은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병농분리 정책의 경우에도,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이나 기나이의 미요시 가문은 돈으로 많은 병사를 고용하고 주요 가신들을 거점에 모아 살게 했습니다. 능력 중심의 인사에 관해서는 급격히 팽창하던 오다 가문 특유의 결과물일 뿐, 호조 가문이나 모리 가문도 비슷한 방식의 인사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 '두 번째 우림'을 철저하게 끝까지 해냈다
앞서 말했듯이 노부나가의 유명한 정책 대부분은 남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좋은 점은 즉시 받아들여 철저하게 실행했다는 데 있습니다.
실력에 따른 보상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아케치 미쓰히데와 하시바 히데요시 같은 신참이 원로 가신을 제치고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 노부나가가 유일했습니다. 아즈치성 역시 천수와 석벽이 그 이전의 어떤 성보다도 압도적이어서, 같은 시대에 석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산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낙시낙좌의 효과 역시 오다 가문의 넓은 영지 덕분이었습니다. 영지가 좁으면 관소 폐지는 큰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시대 유일하게, 남이 시작한 일이라도 좋은 것은 좋다고 인정하고 유연하게 수용하여 끝까지 철저히 추진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부나가의 선견지명은 사실 탁월한 '모방'이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