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1894~1895)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우던 청나라와, 이를 부인하며 청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던 일본 간의 갈등을 주요 원인으로 발발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주 전장이 한반도와 그 주변 해역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 전쟁은 일본에게는 처음 맞이하는 국제적 전쟁이었고, 주변 여건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에 설치된 대본영
메이지 20년대(1887~1894)의 일본은 교통 인프라가 충분히 정비되어 있지 않아 인력과 물자를 전국 규모로 운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청일전쟁 발발에 대응한 정부는 우선 지휘 체계를 구축하고 최전선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첫 전쟁 준비의 첫걸음은 바로 최고 사령부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육군의 최고 지휘 기관인 대본영(大本營)입니다.
대본영은 1893년(메이지 26년) 참모본부 내에 설치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이 직접 지휘한다는 전제 아래 황궁으로 옮겨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본영에는 커다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26년 당시 일본에는 무선 전신이 존재하지 않았고, 유선 전신 역시 대도시 간에만 부분적으로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통 수단도 부족하여 산간 지역은 에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교통 여건이었습니다.
결국 청일전쟁 개전 전까지 최전선으로 이어지는 지휘 계통이 너무 길다는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정부는 과감하게 대본영을 최전선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 지휘를 용이하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선택된 곳이 바로 히로시마였습니다. 히로시마는 육군 제5사단의 관할지로, 1890년(메이지 23년)에는 해군 구레진수부(吳鎭守府)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히로시마항 등 인근 만의 개발이 빠르게 추진되어 대형 선박의 입항이 가능해졌고, 물자를 저장할 충분한 공간도 확보되었습니다.
또한 1894년(메이지 27년) 산요철도가 히로시마까지 개통된 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대본영은 히로시마 이전을 준비했고, 사령부 건물은 히로시마성 내에 자리한 육군 제5사단 사령부 건물로 대체되었습니다. 1894년 7월 25일에는 동중국해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일본 해군 함대가 청나라 북양함대와 교전(풍도 해전)했고, 29일에는 성환에 주둔하던 육군 부대도 청군과 교전(성환 전투)하면서 사실상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9월 8일 대본영의 히로시마 이전을 공포하고, 9월 13일 도쿄의 황궁에서 히로시마성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천황 본인도 이틀 뒤 히로시마로 행차했습니다. 이후 메이지 천황은 히로시마에 머물게 됩니다.
천황의 히로시마 행차에 따라 수행하는 모든 행정 기관들도 히로시마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나아가 10월에 개회 예정이었던 제7회 제국의회는 의원 전원을 히로시마로 소집하고, 도쿄로 돌아가지 않은 채 임시 의사당을 지어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 히로시마는 사실상 일본의 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로시마에 두었던 대본영은 통신 수단이 미발달하던 시대의 긴급 조치였지만, 역사상 매우 드문 사례임에는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