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개와 원숭이 사이였던 사쓰마·조슈!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한 삿쵸 동맹의 성립


8월 18일 정변 이후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서로를 극도로 경계하는 나쁜 관계에 놓였고, 양 번의 노선 역시 공무합체파와 토막파로 갈라지며 대립을 깊어갔습니다.

당시 조슈 번은 막부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장주(長州) 정벌 명령 앞에서 번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 처해 있었고, 사쓰마 번 역시 자신들이 추진하던 막정 개혁이 실패하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양 번은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과 4국 연합 함대의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을 거치며 서구 열강과 직접 교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습니다. 양이(攘夷)의 불가능성과 일본 근대화의 필요성을 그 어느 곳보다 절실하게 실감한 두 번이 손을 잡은 것은, 오히려 필연적인 흐름이었던지도 모릅니다.

삿쵸 동맹의 체결

사쓰마 번의 후원 아래 무역과 해운을 담당하는 근대적 상사(商社)로 설립된 것이 바로 가메야마 사중(亀山社中)입니다. 이곳의 중심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삿쵸 동맹(薩長同盟)은 이 가메야마 사중을 거점으로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당시 조슈 번은 막부에게 위험 요소로 간주되어 무기 수입이 봉쇄되어 있었고, 이는 번의 근대화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료마는 사쓰마 번의 명의로 영국 상인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입해 조슈 번에 넘겼습니다. 그 대가로 사쓰마 번이 부족했던 쌀을 조슈 번에서 공급받음으로써 양 번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군사·물자 교류를 계기로 사쓰마와 조슈는 빠르게 가까워졌습니다. 마침내 1866년(게이오 2년) 1월, 료마의 거듭된 설득 끝에 삿쵸 동맹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라 사쓰마 번은 제2차 장주 정벌에 참여하지 않기로 합니다.

1866년 6월, 사쓰마 번의 불참 속에 제2차 장주 정벌이 시작되었고,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家茂)는 친히 오사카 성에 들어가 진두 지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막부군은 근대화된 조슈군에게 연패를 거듭했고, 고쿠라 성이 함락되면서 막부군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습니다.

막부의 패전으로 막부의 권위는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한 쌀값 폭등은 전국 각지에서 잇따른 민중 폭동과 우치코와시(打ち壊し)를 일으켰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해원대(海援隊)

료마의 출신지인 도사 번에서는 삿쵸 동맹을 중재한 료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1867년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가 료마의 탈번죄를 사면하는 한편 해원대(海援隊)를 설립해 도사 번의 기관으로 삼고 료마를 맞아들였습니다.

료마 역시 고토를 동지로 인정하고 새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 강령을 제안합니다. 그 내용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비롯해 양원제 의회 설립, 관제 개혁, 불평등조약 개정, 헌법 제정, 해군 창설, 친병(직할군) 설치, 금은 화폐 비율 개정 등 8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제안이 고토와 함께 나가사키에서 상경하던 배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여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 불립니다.

훗날 고토가 이를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으로 구체화하면서 시대 상황을 감안해 크게 타협된 형태로 수정되었지만, 료마의 이상은 메이지·다이쇼 시대로 이어지며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고토는 옛 주군인 야마우치 도요노부(容堂)를 설득해 무력으로 막부를 완전히 타도하려는 사쓰마 번을 견제하게 하고, 료마의 제안을 도사 번의 번론으로서 도쿠가와 요시노부(慶喜)에게 건의했습니다. 마침내 1867년(게이오 3년) 10월 14일, 대정봉환 상표(上表)가 조정에 제출되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암살

그러나 료마의 일련의 움직임은 좌막파(佐幕派)와 토막파 어느 쪽에게도 방해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결국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와 함께 교토의 숙소 오미야(近江屋)에 머무르던 중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시대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의 진상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유력한 설은 신센구미와 함께 반막 세력을 단속하던 교토 미마와리구미(京都見廻組)에 의한 암살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 당시 대원이었다는 인물이 범행을 자백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설이 난립하고 있는데, 대정봉환으로 무력 토막의 기회를 잃은 사쓰마 번 혹은 도사 번이 진범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공을 독차지하려던 고토 쇼지로의 살해설, 전쟁 확대를 통한 군수품 이익을 노렸다는 프리메이슨 배후설 등 여러 추측이 존재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전환점에서 핵심 인물이었던 사카모토 료마는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활약은 국력을 보존하는 간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