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다카스기 신사쿠의 쿠데타와 조슈·사쓰마 번의 노선 전환, 그리고 영프 열강의 그림자

막부 말기, 조슈번은 외국 함대와의 충돌과 번 내부 보수파·존왕파의 대립 속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과 쿠데타는 조슈번의 노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이 흐름은 사쓰마번의 변화, 나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대일 정책 각축까지 얽힌 역사적 물줄기로 이어집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쿠데타와 조슈번의 노선 전환

다카스기 신사쿠는 조슈번 보수파의 탄압을 피해 규슈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정벌군이 철수하자 그는 즉시 조슈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항전 없이 막부에 굴복한 보수파에 맞서 번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시모노세키의 고잔지(功山寺)에서 거병합니다.

1863년 6월, 다카스기 신사쿠는 다가올 외국과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의용군 기헤타이(奇兵隊)를 결성했습니다. 대원의 30% 이상이 평민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스스로 모여든 동지들의 집단으로서 다카스기의 모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어 1865년, 다카스기는 가쓰라 고고로 등 존왕파 인사들과 함께 번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성공합니다.

외국 연합 함대에게 참패를 겪으면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카스기 일행은 번론을 '양이'에서 '공의(公議)'로 전환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했습니다.

서양 군제에 밝은 오무라 마스지로의 지도 아래 무장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사카모토 료마의 카메야마 상회(海援隊의 전신)를 통해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습니다.

나아가 사카모토 료마를 중개자로 삼아, 막부 개혁의 전망을 찾지 못하던 사쓰마번과 사장동맹(薩長同盟)을 맺게 됩니다.

사쓰마의 노선 전환과 열강의 각축

사·장 양번의 번론 전환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습니다.

영국은 사쓰마·조슈를 중심으로 한 웅번 연합 정권을 수립하여 무역 이익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863년 사쓰에이 전쟁(영살전쟁) 이후 영국은 사쓰마번에 대해 군함 구매 알선과 본국 유학 수용 등 근대화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노선을 전환한 조슈번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다카스기 신사쿠와 도사번 급진파 인사들의 교류를 주선하는 한편, 웅번 연합 정권 수립이라는 구상을 공의파 학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반면 영국의 움직임에 맞서 막부 측 지원으로 선회한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 공사 로슈(Léon Roches)는 1865년 막부의 요청으로 요코스카 조선소 건설을 맡았고, 1867년에는 요코하마에 프랑스식 훈련소를 설립해 막부군을 교육했으며, 본국에서 군사 고문관을 초빙해 막부의 군제 개혁을 지원했습니다.

더욱이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으로 취임한 후에는 외교 정책에 대한 조언 등 적극적인 막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영·프 대립 구도는 세계적 식민지 쟁탈전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18세기 이래 여러 분야에서 경쟁 관계를 이어온 두 나라는 대일 정책에서도 비슷한 충돌 양상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막부 말기 일본의 혼란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영·프 대립의 '대리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효고 개항 문제와 정국의 전환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효고 개항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영국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해 왔던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메이 천황의 반대로 좌초됐던 효고 개항을 과감히 요청하며, 웅번 제후 주도로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5대 쇼군 요시노부는 고메이 천황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칙허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막부가 외교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막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자 사쓰마번은 공의정체론에 의한 정치 운영을 포기하고 무력에 의한 토막(討幕) 노선으로 선회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