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 문록의 역(임진왜란)과 1598년 게이초의 역(정유재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견했습니다.
이른바 조선 출병은 흔히 히데요시의 팽창욕에서 비롯된 돌발적인 폭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준비가 갖춰진 거대한 구상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각 다이묘가 사실상 독립된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아무리 천하인(天下人)으로 군림했더라도, "좋아, 이제 조선으로 가자!"라는 말 한마디로 스스로 전장에 나서는 다이묘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일본 경제는 상업을 통한 화폐 경제가 발달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습니다. 굶주림 때문에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기에 전쟁의 필요성도 낮았습니다.
그렇다면 히데요시는 대체 왜 조선으로 병력을 보냈을까요?
대륙 진출 구상의 원조는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초기부터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명(明)과의 교역을 위해 한반도를 통한 외교적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회답을 얻지 못하자 무력 행사까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안토 성(安土城)의 연회에서 노부나가는 "훗날 명을 정벌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일본의 정세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기에, 히데요시를 비롯한 가신들은 이를 "절반은 허풍" 정도로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을 계승한 히데요시가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냈을 때, 과연 노부나가가 남긴 대륙 진출의 꿈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스페인 식민 제국이라는 시대적 배경
아시아 진출을 논할 때 당대에는 스페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세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강국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명(明)과 그 속국들만이 스페인의 세력권 밖에 남아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명을 공략한다면, 그것은 곧 일본에게도 중대한 위협이 됩니다.
유럽 열강의 아시아 지배와 그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한반도·중국 대륙 진출 구상은,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노예 해방설과 조선 백성들의 처지
필자는 앞선 글에서 히데요시의 노예 해방에 대해 다룬 바 있습니다. 타인을 강제로 속박에서 풀어주는 행위는 당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곧 악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며, 기독교 국가들 역시 이교도 국가를 침공해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안토-모모야마 시대의 대륙 강국 명(明) 또한 정복 전쟁을 통해 전원(元)의 잔당을 몰아내고 만주의 여진족을 지배했으며, 베트남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명은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에 맞서 원군을 파견했는데, 그 병력 가운데에는 태국·티베트·인도·미얀마 출신 병사들도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한반도를 다스리던 조선 역시 북방을 향해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혔습니다. 세종대왕은 조선 왕조의 명군으로 꼽히지만, 그의 정벌 과정에서 현지에서 약탈이나 노예화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 점령 과정에서 가신들의 난폭한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이 명령이 어디까지나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본의 국가 원수가 비인도적 행위를 금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억압 속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백성이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던 농민이 적지 않았고, 그들 눈에 히데요시는 해방자로 비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선조실록』에도 왕조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게나마 백성들이 일본군에 협조한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성의 왕궁이 불타고 약탈당한 것도 일본군이 아니라 현지 백성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노예를 관리하던 관청이 불탔는데, 그곳에 보관된 노예 신분 증명 장부가 함께 소실되면서 많은 이들이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노예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새로운 지배자에게 기대를 걸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습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담당한 지역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졌고, 기요마사 본인도 "백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노예 대우를 받던 이들 외에도, 다양한 계층에서 히데요시 군에 적극 협조하거나 평화롭게 귀순한 사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 다만 조선 백성이 왜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는 서술은 필자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통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학계에서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 출병이 열강에 끼친 파장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조선 출병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는 세계적으로도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명(明)은 작은 섬나라 정도로 여기던 일본과 징벌적 타격 없이 화의를 맺었지만, 조선 구원을 위해 지출한 막대한 군비는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고, 조정 내부의 갈등은 계속되다 끝내 멸망하여 강대국 청(淸)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전투력을 통해 청과 일본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스페인의 침공 대상은 명이거나 일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물론 침입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역시 조선 출병을 계기로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내부에서 붕괴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어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만약 도요토미 정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에도 시대 같은 평화로운 세계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며, 메이지~쇼와 시대의 일본의 대륙 침공이 예정보다 앞당겨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일본은 물론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