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라고 하면, 수많은 책과 TV 프로그램에서 다뤄졌으며 역사 인물 인기 순위에서 항상 1~2위를 다투는 인물입니다.
이름은 알지만 "부츠 신고 능글맞게 말하는 그 사람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충분히 알게 되실 겁니다.
이번 시간에는 에도 막부 말기의 인기 영웅, 사카모토 료마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료마는 근대에 와서야 유명해진 인물로, 에도 시대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카모토 료마, 간단 프로필!

생몰년: 1836년~1867년 (1853년 페리가 요코스카 우라가에 흑선으로 입항하면서 '막막(幕末)'이 시작됩니다.)
0세: 태어나기 전날 밤, 어머니 '오류(阿龍)'가 꿈을 꾸었습니다. 태어난 아기의 등에는 갈기 같은 털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름 '료마(龍馬)'가 정해진 계기죠. 마치 만화 같은 일화입니다.
17세 무렵: 에도에서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간 머물렀습니다. 바로 그해 페리의 흑선이 우라가에 입항합니다.
20세 무렵: 두 번째 에도 검술 수행을 떠납니다.
26세 무렵: 도사 번(현 고치현)을 탈번(脫藩)합니다. 탈번은 중죄였고, 가족에게 큰 폐를 끼치는 행위였습니다. 마치 여권 없이 해외로 나가는 것과 같죠. 이후 막부의 거물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제자가 됩니다. 가쓰 가이슈는 료마에게 외국에 대한 큰 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29세 무렵: 일본 최초의 무역회사 '거양상회(亀山社中)'를 나가사키에 설립합니다.
30세 무렵: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현)과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의 중개를 맡아 사쓰마-조슈 동맹을 성립시킵니다. 그 직후 교토 후시미의 데라다야 사건으로 막부 관변의 습격을 받고 손에 중상을 입습니다. 사진에서 손을 감추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1세 무렵: '거양상회'를 '해원대(海援隊)'로 개편하고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어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성립됩니다. 대정봉환이란 막부가 정치 실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260년 역사의 막부는 이로써 막을 내린 것이죠.
그리고 교토의 간장 가게 오미야(近江屋)에서 료마는 암살당하고,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사카모토 료마를 암살한 범인은 누구?
1. 신센구미설
현장에는 신센구미의 칼집(사야)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칼집 없이 어떻게 돌아갔을까요? 맨 칼로!?
범인은 "코나즈소(小僧)!"라고 이요 방언(에히메 방언)으로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이요 출신인 신센구미 10번대 대장 하라다 사노스케(原田左之助)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죠. 하지만 국장 곤도 이사미(近藤勇)는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2. 기슈 번설
해원대의 증기선 이로하마루가 기슈 번(현 와카야마현) 군함 메이코마루와 충돌했습니다.
료마는 침몰한 이로하마루에 총과 금괴가 실려 있었다며 기슈 번에 배상금을 요구했고, 지금 가치로 약 25억 엔에 달하는 금액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배상금을 받은 지 일주일 후 료마가 암살당했습니다. 기슈 번이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걸까요?
흥미롭게도 현재 이로하마루를 조사해보면 총도 금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료마의 허풍이었을까요?
3. 사쓰마 번설
사쓰마-조슈 동맹을 주선한 료마는,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길 원했던 사쓰마 번 입장에서 '대정봉환'을 성립시킨 료마가 방해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막부가 없어진 후의 새 체제에 대한 의견이 료마와 맞지 않았던 걸까요? "어제의 벗은 오늘의 적"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4. 외국인설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무기를 팔 수 있었겠지만, '대정봉환'으로 그 계산이 무너졌다는 설입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일본인 한 명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5. 나카오카 신타로설
료마와 같은 도사 번 출신으로 사쓰마-조슈 동맹을 함께 달려온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도 사쓰마 번처럼 무력 토막을 원했습니다. 사쓰마 번이 료마 암살에 이용했다가, 결국 입막음을 위해 함께 죽였다는 설입니다.
반대로 나카오카를 노린 범인과 마침 함께 있던 료마가 연달아 살해당했다는 '우발적 동반 피해설'도 있습니다. 료마가 사실 조연이었다는 설이죠. 사실이라면 좀 씁쓸하네요.
참고로 나카오카는 '일본 최초로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활짝 웃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현대적 감각으로는 별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를 상상하며 보면 꽤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 인물은 그를 제외하면 없으니까요.
6. 교토 미마와리구미(見廻組)설

바로 이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 이론입니다.
메이지 이후 구 미마와리구미 대원 이마이 노부오(今井信郎)가 증언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인물인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흉변'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오미야 2층 방에 들어간 후 어느 쪽이 료마인지 나카오카인지 몰라서,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필명인 사이야 우메타로(才谷梅太郎)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사이야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어디 있었습니까?"
대답하려던 순간 즉시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 초에 또 다른 구 미마와리구미 대원이 이마이와 다른 증언을 했지만, 확증은 되지 않았습니다.
막막의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성!

・ 료마의 서한은 100통 이상 확인되었으며, 모두 매우 유머러스합니다.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을 때, 당시로서는 드문 가타카나로 "에헨, 에헨"이라고 자랑스럽게 적어두었습니다. 료마의 명대사인 "일본을 한 번 다시 만들어 보이겠다"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의 문장입니다. 비유가 무척 멋스럽죠?
・ 당시 무사들은 보통 칼을 차고 조리를 신었지만, 료마는 권총을 차고 부츠를 신었습니다.
・ 친구와의 대화에서 장검이 유행할 때는 "단검이 더 쓰기 편하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총 앞에서는 칼이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총을 사서 다시 만났을 때는 외국 책을 들고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료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료마는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된 때부터 죽음까지 단 5년 만에 세계를 반 바퀴 돌았다고 불립니다. 기차도 비행기도 없던 시절이었죠.
・ 어린 시절 친구와의 첫사랑, 나가사키의 게이샤와의 로맨스 등 여성 관계도 화려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내 오료(お龍)와 치바 도장의 치바 사나코(千葉さな子)입니다.
데라다야에서 료마가 관변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오료가 목욕 중에 거의 알몸 상태로 달려와 위험을 알린 일화는 유명합니다. 사건 직후 료마와 오료는 일본 최초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말년에는 술을 마시면 "내가 료마의 아내였다"는 말이 버릇이 되었고, 임종 직전까지 "료마, 료마!"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치바 도장의 사나코는 료마가 검술 수행차 에도에 왔을 때 만났고, 약혼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사나코는 평생 시집가지 않고 료마의 소매를 유품으로 간직했습니다. 사나코의 묘비에는 '사카모토 료마실(室)'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씁쓸하지만 아름답네요.
정리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미스터리.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능력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행동력.
유머 넘치는 편지 문장.
동료들에게 신뢰받는 리더십과 죽어서도 여성들의 마음속에 남는 인간성.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