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헤이안 시대 국풍문화의 발전 – 가나 문자·문학·정토불교와 귀족 생활

7세기 이후 일본은 대륙의 우수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9세기 후반부터 일본과 대륙 간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면서 특히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풍토와 취향에 맞는 우아하고 세련된 국풍문화가 탄생했다.

가나 문자의 발달과 『고킨와카슈』

국풍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가나 문자의 발달이다.

이 시기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널리 사용되면서 일본 고유의 감정과 정서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 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먼저 와카가 유행하였고, 905년 기노 쓰라유키 등이 편찬한 최초의 칙선 와카집인 『고킨와카슈』가 등장했다. 이곳에 수록된 와카들은 섬세하고 뛰어난 노래풍 덕분에 오랫동안 와카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고킨와카슈』 이후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신킨와카슈』에 이르기까지 칙선 와카집은 여덟 차례에 걸쳐 편찬되었으며, 이들을 통틀어 팔대집(八代集)이라고 부른다.

가나 문자는 공식 문서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쓰이게 되었다.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이세모노가타리』 등 훌륭한 가나 문학 작품에 이어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 같은 대작이 탄생했다.

또한 세이 쇼나곤이 궁중 생활 경험을 수필 형식으로 담아낸 『마쿠라노소시』는 『겐지모노가타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나로 쓴 일기 문학의 시초는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니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궁중에서 시중을 든 여성들의 붓에서 나온 작품이 많으며 그 안에는 섬세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다.

이처럼 가나 문학은 천황의 후궁으로 들어간 재능 있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정토불교의 확산

귀족 정치 시대의 불교는 천태종과 진언종 두 종파가 압도적인 세력을 유지했으며, 기도를 통해 현세적 이익을 추구하던 귀족들과 밀접하게 결합했다. 한편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부처와 일본 고유의 신을 연결하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도 생겨났다.

아울러 원령과 역신(疫神)을 제사함으로써 역병이나 기근 같은 재앙을 물리치려는 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어령회(御靈會)가 열리게 되었다.

현세의 이익을 구하는 신앙과 더불어,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토불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토불교는 아미타여래를 믿어 사후에 장엄한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고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교법이다. 처음에는 공야(空也)가 교토 시내를 돌며 설교하였고, 겐신(源信)은 왕생론서인 『왕생요집』을 저술하여 주로 귀족을 중심으로 하되 백성들에게까지 정토불교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말법사상도 한층 강화되었다.

국풍문화의 건축과 미술

국풍문화는 건축과 예술 작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건축 분야에서는 귀족 저택에 흰 목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지붕에는 히노키피를 얹은 침전조(寢殿造)라는 일본 고유의 양식이 자리 잡았다. 건물 내부의 장판과 병풍에는 카라에(唐繪) 대신 일본풍 소재를 그린 야마토에(大和絵)가 즐겨 그려졌다.

저택의 가구에도 옻칠 기법이 많이 활용되어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예 분야에서도 우아한 선을 살린 일본풍 서체가 카라풍 서체를 대체하며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웠다.

정토불교의 성립과 함께 관련된 건축물과 예술품이 다수 조성되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세운 호조지는 아미타당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사원이었으며,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우지에 세운 평등원 봉황당은 아미타당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귀족의 생활

귀족들은 개방적인 침전조 건축물 안에서 다다미를 깔고 생활했다.

식생활은 비교적 소박했으며,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고 하루 두 끼를 기본으로 삼았다.

남자는 10~15세 사이에 관례를 올려 성인이 되었고, 여자는 상두(裳着) 의식을 통해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남자는 관직을 받아 조정에 출사했으며, 남자의 정례복은 속관(束帶), 평상복은 이칸(衣冠), 여자는 여방복인 십이단(十二単)을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의복들은 카라풍 의복을 우아하게 일본풍으로 다듬은 것이었다.

헤이안 귀족은 길흉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점을 통해 운명과 길흉을 살펴 재앙을 피하고 행운을 부르고자 했으며, 일상생활 곳곳에서 길흉을 기준으로 삼아 여러 가지 금기와 제약 속에 살았다.

그렇게 행운을 기원하며 살았음에도 현실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깊이 낙담하기 마련이었다. 바로 이 점이 내세에 의존하는 정토불교가 귀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