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인(天下人)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
히데요시가 죽은 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면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결국 에도 막부 개창 12년 후, 전국 시대의 마지막 대규모 전쟁인 '오사카 진(大阪の陣)'이 시작됩니다.
궁지에 몰린 히데요리의 운명은 어떠했을까요?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1593년, 히데요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7세였을 때 오사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이름은 '히로이(拾)', 즉 '주운 아이'였습니다.
히데요리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이름이 바로 '스테(棄)', 즉 '버린 아이'였습니다. 이는 당시 '버려진 아이가 잘 자란다'는 미신에 따른 작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형 '스테'는 세 살에 요절했기 때문에, 다음 아이에게는 반대로 '주운 아이'라는 의미의 '히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런 한편, "히데요리 군은 히데요시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정실 부인 외에 20명이 넘는 측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끝내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0세 무렵의 측실 요도도노(淀殿) 사이에서 두 아이가 연달아 태어난 것입니다.
요도도노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로, 아버지와 오라비가 과거 히데요시에게 살해당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후계자까지 낳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기도 하죠.
요도도노는 '일본 3대 악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도요토미 가문을 찬탈하려던 계획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히데요리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말이 나온 배경에는, 오쿠라교부(大蔵卿局)의 아들이자 무장인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오사카 진이 끝날 때까지 요도도노와 히데요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하루나가와 요도도노는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자란 사이였습니다. 실제로 그 시절부터 이미 히데요리의 친아버지는 이 사람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은 급속도로 커져갑니다.
이윽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는 아직 도요토미 대 도쿠가와의 싸움이 아니라, 천하는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의 것이라는 상태에서 벌어진 내분에 가까웠습니다. 양측 모두 "히데요리 님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싸웠죠.
이에야스가 승리해 에도 막부를 열었지만, 도요토미 가문은 여전히 더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고, 양가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집니다.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리가 성장하면 정권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지만, 이에야스는 쇼군 직위를 제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이는 '정권은 앞으로 도쿠가와 가문이 쥐고 간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행보였습니다.
게다가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의 알현을 강요합니다. 이는 사실상 '도요토미가 도쿠가와의 신하가 되었다'고 인정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와 히데요리가 혼인하면서, '아내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어른을 뵙는다'는 명목으로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와의 알현을 받아들입니다.
마침내 이에야스와 마주 선 히데요리는, 전해지는 바로는 키 197cm에 몸무게 161kg에 이르는 거구였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위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때 "도요토미 가문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전해집니다.
히데요시는 왜소한 체구였기 때문에, '역시 피가 연결되지 않았다'는 설에 신빙성이 실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리가 22세가 되던 해, 드디어 도요토미 대 도쿠가와의 '오사카 진'이 발발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 진에서 살아남았을까?
오사카성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잃고 떠돌던 낭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바라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명한 산다 유키무라(真田幸村)도 있었습니다.
유키무라의 분전 덕분에 '오사카 겨울진'은 도요토미 측이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유키무라는 전국 시대 최강의 무장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그 전까지 그는 '산다 가문의 차남' 정도로만 알려진 무명의 장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에야스는 '화의를 맺자'고 제안합니다. 히데요리는 이것이 이에야스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승낙한다!'고 응답합니다.
강화 조건은 오사카성의 외곽 해자(외호)를 메우는 것이었고, 결국 성은 거의 벌거벗은 듯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몇 달 뒤, 예상대로 이에야스는 다시 공격해 옵니다.
도요토미 측은 '이에야스도 늙었으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순진한 판단이었습니다.
'오사카 여름진' 끝에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스스로 목숨을 끝냈으며, 히데요리의 나이는 23세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흔히 그렇듯, 사실 그는 살아남았다는 생존설도 존재합니다.
사쓰마(현 가고시마현)로 살아남아, 훗날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실제로 사쓰마에는 히데요리의 무덤도 남아 있다고 하죠.
한편 최근에는 오사카성 발굴 조사에서 두개골 하나와 신체 뼈 두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체격과 나이로 미루어 그 두개골이 히데요리의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생존설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미스터리 같은 설들을 상상하며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참된 묘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