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도쿠가와 고산케] 도쿠가와 막부의 후계 문제를 위해 만들어진 세 가문!

"도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라는 말은 TV 사극이나 역사 프로그램을 보면 자주 들리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름은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어떤 가문인지", "언제,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도쿠가와 고산케의 탄생 배경과 역할을 살펴보고, 이와 비슷한 개념인 도쿠가와 고산교(御三卿)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도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해 삼대장, 삼대 가문 등을 늘어놓곤 하는데, 에도 시대 일본에도 그런 '셋'이 존재했던 셈입니다.

도쿠가와 고산케를 만든 사람과 그 의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제2대 쇼군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이 천하는 더 이상 도요토미의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의 것"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에야스의 열한 아들들

이에야스에게는 열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장남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할복했고, 차남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 히데타다가 도쿠가와 제2대 쇼군이 되었습니다.

넷째와 다섯째 아들은 각각 28세와 21세로 요절했고, 일곱째와 여덟째 아들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섯째 아들 타다테루는 오래 살았지만,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이유 없이 미움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던 데다 외모가 못났다는 등 안타까운 이유도 있었다고 하니 조금 가엾은 인물입니다.

이에야스는 마침내 아홉째, 열째, 열한째 아들에게 제2대 쇼군 히데타다를 보좌하게 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 아홉째 아들 ·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 열째 아들 · 기슈 도쿠가와 가문(紀伊徳川家)
  • 열한째 아들 ·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

이것이 도쿠가와 막부 최고위 격의 친번(親藩) 가문, 즉 고산케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쇼군 가문의 후계가 끊길 경우에는 오와리 가문 또는 기슈 가문에서 양자를 들인다"는 규칙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미토 가문은 왜 후계 규칙에서 빠져 있을까요?

원래 '도쿠가와 고산케'라고 불린 것은 "쇼군 가문, 오와리 가문, 기슈 가문"이었으며, 미토 가문은 도쿠가와 5~6대 무렵부터 고산케에 합류하게 됩니다.

고산케에서 쇼군이 배출되었을까?

도쿠가와 제7대 쇼군까지는 제2대 쇼군 히데타다의 직계 자손 중에서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제7대 쇼군 이에츠구는 5살에 쇼군에 임명되어 3년 뒤 8살로 요절하면서 쇼군의 직계 혈통이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드디어 여기서 고산케가 활약할 차례입니다!

기슈 가문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양자로 입적되어 도쿠가와 제8대 쇼군이 됩니다. 바로 그 유명한 '폭력 장군(暴れん坊将軍)'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인물입니다.

이후 제14대 쇼군 이에모치 역시 기슈 가문에서 배출됩니다.

참고로 제8대 쇼군을 선정할 당시 쇼군 가문 직계에는 마츠다이라 키요타케라는 인물 단 한 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제6대 쇼군의 동생으로 다케바야시 번(군마현)의 번주였지만, 이미 54세의 나이에 번 재정도 궁핍했고 백성들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처지였습니다. 본인도 쇼군이 될 뜻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제15대 요시노부는 미토 가문 출신입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요시노부는 고산케가 아닌 '고산교' 중 하나인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미토 가문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고산케 중 가문의 서열이 가장 높았던 오와리 가문에서는 단 한 명의 쇼군도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오와리 가문에서 쇼군이 나오지 못한 이유

사실 오와리 가문에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제6대 쇼군 이에노부는 사망하기 약 한 달 전, "5살밖에 안 된 이에츠구(훗날 제7대 쇼군)에게 물려주어 소란을 일으키느니, 차라리 오와리 가문의 도쿠가와 요시미치에게 주는 편이 낫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러나 가신들은 오와리 가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어린 이에츠구를 제7대 쇼군으로 세웠습니다.

게다가 3년 뒤 이에츠구가 사망하자 이번에는 오와리 가문의 도쿠가와 츠구토모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하지만 츠구토모는 검약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딱딱한 성격 탓에 인망을 얻지 못했고, 오와리 가문 내부에도 "오와리는 쇼군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는 가훈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기슈 가문의 요시무네가 제8대 쇼군이 됩니다.

쇼군 가문과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음에도 오와리 가문에서는 쇼군이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와리 가문의 역대 영주와 자손들은 급사나 요절이 많았는데, 약간의 음모설까지 수군거려졌다고 합니다. 너무 엄격한 가풍이 정치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8대 쇼군으로 선출된 요시무네가 고산케와 유사한 '고산교'를 새로 만들면서, 오와리 가문은 쇼군 후계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아마도 그 불만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에도 시대 말기 구 막부군 대 신정부군의 전쟁인 보신 전쟁 때 오와리 가문은 막부의 적 편, 즉 신정부군 쪽에 섭니다. 역사를 흥미롭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도쿠가와 고산교(御三卿)란?

[도쿠가와 고산케] 도쿠가와 막부의 후계 문제를 위해 만들어진 세 가문!

제8대 요시무네의 혈통! 고산교의 성립

제8대 쇼군 요시무네 대에 이르러 쇼군 가문과 고산케 가문 사이의 혈연은 옅어졌고, 여기에 오와리 가문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고산교'가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실제로 오와리 가문에서는 쇼군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니, 후자의 이유가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요시무네의 둘째 아들 ·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田安徳川家)
  • 요시무네의 넷째 아들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一橋徳川家)
  • 요시무네의 장손(제9대 쇼군 이에시게의 아들) · 시미즈 가문(清水家)

이 세 가문이 바로 '도쿠가와 고산교'입니다.

제15대 쇼군 요시노부는 바로 이 히토츠바시 가문 출신이며, 다만 태어난 곳은 미토 가문이었습니다.

기슈 가문 vs 미토 가문!

제14대 쇼군을 정하는 과정에서 '쇼군 상속 문제'가 폭발합니다. 히토츠바시 가문의 요시노부를 세울 것인가, 아니면 기슈 가문의 이에모치를 세울 것인가가 쟁점이었습니다.

히토츠바시 가문은 기슈 가문의 계보를 이었지만, 요시노부가 미토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미토 번 사람들의 지지가 강했습니다.

결국 이에모치가 쇼군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이이 나오스케 대 미토 번의 대립이 심화되어 '사쿠라다몬 외문 변'이라는 비극을 낳게 됩니다.

정리

도쿠가와 막부는 2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속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후계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어느 가문이든 쇼군을 배출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성공해낸 것은 기슈 가문이었습니다.

도쿠가와 고산케의 각 가문은 오늘날에도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