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인도 비협조 운동의 역사: 간디가 이끈 평화 저항의 전환점

비협조 운동(Non-Cooperation Movement)은 인도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 운동 중 하나로,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여 영국 식민 정부에 대한 협력 거부와 불복종을 통해 자치(Swaraj)를 쟁취하고자 했던 평화 저항 운동입니다. 이 글에서는 비협조 운동의 배경, 전개 과정, 그리고 비하르 지역에서의 활동과 운동의 의미까지 자세히 살펴봅니다.

비협조 운동의 시작과 결의

비협조 운동의 결의안은 1920년 9월 인도 국민회의 캘커타 특별 회기에서 공식적으로 통과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나그푸르 회기에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비하르 지역에서는 유사한 결의가 채택되어 민족주의자들이 정부와의 비협조 행동에 나선 상태였습니다.

1918년 8월 29일, 비하르 출신의 저명한 변호사 하산 이맘이 의장을 맡은 뭄바이 회기에서 인도 국민회의는 몽태규-첼름스퍼드 보고서를 검토했습니다. 회의에서는 이 보고서에 대한 불만이 거세게 표출되었고, 하산 이맘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영국으로 파견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자는 제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로울랫 법과 전국적 반발

그러던 중 영국 정부는 혁명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로울랫 법(Rowlatt Act)의 일부 조항을 발동했습니다. 재판 없이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게 한 이른바 '흑색 법'에 맞서 간디의 지도 아래 전국적으로 대중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4월 6일에는 비하르에서도 대규모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비하르에서 펼쳐진 비협조 운동

비협조 운동 과정에서 마즈하룰 하크,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 브라지 키쇼레 프라사드, 무함마드 라피 등 비하르의 주요 지도자들은 입법부 선거에서 후보 등록을 철회했습니다. 또한 마헨드라 프라사드, 아누그라 나라얀 싱, 브리 난단 프라사드 등은 영국 통치 기구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법원 불매 운동에 나섰습니다.

학생들에게 대체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나-가야 도로변에 내셔널 칼리지(National College)가 설립되었습니다. 1921년 2월 6일, 간디는 직접 같은 부지에서 비하르 비드야피트(Bihar Vidyapeeth)를 개교했습니다. 마즈하룰 하크가 총장을, 브라지 키쇼레 프라사드가 부총장을,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가 학장을 맡았습니다.

1921년 9월 30일, 마즈하룰 하크는 사다카트 아슈람(Sadaqat Ashram)에서 '더 머더랜드(The Motherland)'라는 신문 발행을 시작하며 여론 형성에도 앞장섰습니다.

차우리 차우라 사건과 운동 중단

1921년 12월 22일, 영국 왕세자가 파트나를 방문했을 때 도시 전역에서 파업이 일어나며 비협조 운동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1922년 2월 5일, 우타르프라데시주 고라크푸르 인근 차우리 차우라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관들이 화형당하는 폭력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폭력을 신념으로 삼던 간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운동 전면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1922년 3월 10일 간디는 체포되었고, 이러한 사건들의 여파로 비하르에서도 비협조 운동의 기세는 점차 수그러들었습니다.

운동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킬라파트 운동과 비협조 운동은 비하르 지역의 정치적 각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비하르는 전국 민족 운동의 주류에 완전히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운동의 영향은 당시 무자파르푸르와 샤하바드 지구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났으며, 아라, 가야, 란치, 기리디, 문게르, 키샨간지, 푸르니아 등 여러 도시에도 파급되었습니다. 파트나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슬림 사회에도 새로운 각성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영국 정부에 대한 비협조의 일환으로, 마울라나 사자드는 풀와리 샤리프에서 이마라트-에-샤리아(Imarat-e-Shariah)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이 조직의 활동 지역은 비하르와 오리사였으며, 정부 기관의 도움 없이 무슬림들이 종교적·사회적 문제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상호 경계심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조직은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맺음말

비협조 운동은 무장 투쟁이 아닌 평화로운 비폭력 저항으로 식민 지배에 맞선 최초의 대규모 대중 운동이라는 점에서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차우리 차우라 사건으로 조기에 중단되었지만, 이 운동은 수백만 인도인에게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의 세월 참여 운동과 완전한 독립을 향한 길을 여는 초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