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진주만 공격에 대한 단순한 반응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극동 지역에서 일본이 수년간 지속해 온 침략 행위가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1931년 만주 침공과 점령으로 시작해, 1932년 상하이 폭격, 그리고 1937년 중국 본토 전면 침공으로 이어지며 한층 노골화되었습니다.
일본의 확장주의와 영국의 경계
1931년 9월 봉천(묵덴)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무력 점령한 일본은 국제연맹의 규탄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을 수립하며 사실상의 식민 통치를 강화했습니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도시를 폭격했고, 1937년 마르코폴로 다리 사건을 도화선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내륙 깊숙이 진격했습니다.
영국은 홍콩, 말라야,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식민지와 경제적·전략적 이해관계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남하 정책에 점점 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영국은 여러 차례 외교 협상을 통해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1941년 말이 되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졌습니다.
연합국의 공동 선전포고
영국의 대일 선전포고는 미국, 중국, 네덜란드 등 연합국이 함께 참여한 더 넓은 범위의 공동 대응의 일환이었습니다. 선전포고는 진주만 공격 하루 뒤인 1941년 12월 8일에 이루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윈스턴 처칠 총리가 미국 의회가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결의하기 앞서, 영국이 먼저 일본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일본의 위협에 대해 영국이 오랫동안 각오를 다져 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극동 전선의 개막
선전포고 직후 극동 지역에서 곧바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일본군의 말라야 침공은 진주만 공격과 거의 동시에 개시되었으며, 영국군은 버마, 말라야, 싱가포르 전선에서 일본군과 격렬하게 교전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말에는 홍콩도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초기 전세는 일본에게 기울었습니다. 1942년 2월 싱가포르가 함락되자 처칠은 이를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고 평할 정도의 충격적인 패배를 맞이했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 초기 연합국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