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는 영화 『은방울꽃(Lilies of the Field)』에서의 연기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시작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스카상을 품에 안은 시드니 포이티어
그는 평생 자신을 바하마 사람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마이애미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며, 이 우연한 출생은 그에게 미국 국적을 안겨주었습니다. 1927년, 부모가 마이애미에 머무는 동안 시드니는 7개월이나 일찍 태어난 미숙아였습니다. 아이가 적절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는 마이애미에 3개월간 머물렀고, 아기가 회복된 뒤 바하마 캣 아일랜드로 돌아갔습니다. 10세 무렵에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수도 나소로 이주했습니다.
1943년 1월, 15세의 시드니 포이티어는 나소의 가난한 농가를 떠나 '기회의 땅'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당대 수많은 배우들이 그랬듯, 그 역시 험난한 나그네의 삶을 겪어야 했습니다. 길에서 잠을 자고, 설거지로 생계를 이었으며,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17세 무렵, 이곳에는 자신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바하마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항공료를 낼 돈이 없었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친애하는 루즈벨트 대통령님,
제 이름은 시드니 포이티어이고, 지금 미국 뉴욕에 있습니다. 저는 바하마 출신입니다. 바하마로 돌아가고 싶지만 돈이 부족합니다. 100달러를 대출해 주시면, 바하마에 도착하는 대로 갚겠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형제자매들이 그립습니다. 카리브해에 있는 고향이 그립습니다. 미국 생활, 특히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저는, 미국 시민권자로서 귀국할 수 있도록 100달러를 대출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반드시 갚아드리고 영원히 감사하겠습니다.
시골에서 온 소년,
시드니 포이티어
답장과 귀국 여비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뉴욕 할렘의 흑인 극장 단체인 미국 흑인 극장(American Negro Theatre, ANT)에 합류했습니다. 신진 배우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던 이곳에서 그는 곧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대통령이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대한 배우가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출처 및 이미지: This Life – Sidney Poitier, Los Angeles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