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에서 가장 '대통령다운 대통령'으로 꼽히는 인물이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라면, 반대로 가장 '대통령답지 않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제28대 우드로 윌슨일 것입니다.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몸소 경험한 뒤 국제연맹을 창설한,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했던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윌슨
우드로 윌슨은 1856년 버지니아주에서 아버지 조지프 러글스 윌슨(오하이오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남북전쟁 이후 버지니아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독실한 칼뱅주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아버지는 미국 장로교회 설립에도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 또한 학자였기에, 윌슨은 어떤 의미에서 학자 집안의 핏줄을 이어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윌슨은 태어날 때부터 학습장애(LD), 특히 난독증을 갖고 있어 글자를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879년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뒤 버지니아대학교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약 1년 만에 변호사 일을 접고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우드로 윌슨은 2019년까지 취임 전에 박사학위를 보유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그는 1890년부터 모교인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고, 1902년에는 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어 1910년까지 재직했습니다.
1910년 민주당의 추천을 받아 뉴저지주 주지사가 된 그는, 191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표가 분산되었고, 개표 결과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미국 제28대 대통령

윌슨의 재임 기간은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미주 지역에서는 1913년부터 시작된 멕시코 혁명에 개입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철수했고, 1915년에는 아이티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래의 미국 제국주의 노선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윌슨의 외교는 루스벨트의 강경 외교나 태프트의 달러 외교와 달리 '선교 외교(missionary diplomacy)'라고 불립니다.
1914년 유럽 대륙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미국은 초기에 먼로 독트린에 따라 불개입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비롯해 미국도 참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루시타니아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은 더욱 기울었습니다. 결국 1917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때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을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라 규정하고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전쟁에 임했습니다. 이 원칙은 영토 내 다수의 민족을 거느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영국 제국 등에 서서히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했고,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 황제는 처형되었으며,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탄생했습니다.
사회주의 확산을 위협적으로 여긴 윌슨은 이에 대한 견제책으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14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강화 교섭의 공개와 비밀외교 폐지
- 공해상 항행의 자유
- 관세 장벽 철폐(평등한 무역 관계 수립)
- 군비 축소
- 식민지에 대한 공정한 처우
- 러시아에서의 철군과 러시아 정부 형태의 자유로운 선택 보장
- 벨기에 주권 회복
-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반환
- 이탈리아 국경의 재조정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민족 자치
- 발칸 국가들의 독립 보장
- 터키 통치 하의 민족들에 대한 자치 보장
- 폴란드 독립
- 국제 평화 기구의 설립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발표했음에도 윌슨은 러시아에 대해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고, 영국·프랑스·일본과 함께 소비에트 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윌슨 역시 회의에 참석해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제재를 삼가자고 제안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은 결국 독일에 베르사유 조약을 억지로 강요했고, 이는 독일을 사실상 파탄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이후 윌슨의 제안으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지만, 먼로 독트린을 중시하던 미국 본국은 정작 이곳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윌슨은 임기를 마친 뒤 물러났고, 192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7세였습니다.
우드로 윌슨에 대한 개인적 평가

우드로 윌슨은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언제나 훌륭한 이념을 내걸었지만, 그의 실상은 그 이념과 큰 모순을 이루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윌슨 본인은 국제연맹 창설과 14개조 평화 원칙을 진지하게 추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윌슨은 좋으든 나쁘든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라 탁월한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념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고, 국내적으로 큰 혼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승전국이 되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성장했으며,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도약했습니다.
따라서 윌슨만큼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도 없습니다.
이념가로서는 0점에 가깝지만, 실천가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대통령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상을 지니면서도 현실과 현명하게 타협할 줄 알았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좌절한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대통령으로서는 크게 성공했고, 한 개인으로서는 꿈을 좇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격적인 측면에서 윌슨은 대통령으로서 링컨에 필적하는 수준이며, 역사적으로 윌슨 같은 인물은 드뭅니다.
우드로 윌슨은 정말로 평화를 사랑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