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킨 윌리엄 매킨리, 미국 제국주의 시대를 연 제25대 대통령

개척 시대의 끝, 해외 팽창의 시작

19세기 90년대, 백인들이 바라보던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 경계선(frontier)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팽창주의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고, 미국은 더 많은 영토를 찾아 바다 건너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는 바로 이러한 미국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대통령입니다.

남북전쟁 출신 마지막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1843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이어진 '오하이오 출신 대통령' 계보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남북전쟁 이후에는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벤저민 해리슨 등 오하이오 출신 대통령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는데, 이는 전쟁 이전에 버지니아 출신 대통령이 많았던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러한 변화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 정치가 크게 재편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남부의 힘은 약해지고 북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또한 부유층과 산업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는 공화당이 높은 관세를 부과해 외국 제품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던 시기였고, 이는 미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매킨리의 조상은 18세기 전반에 미국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이민자였으며, 매킨리 자신은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60년 알레게니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매킨리는 남북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는데, 당시 그의 상관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러더퍼드 B. 헤이스였습니다.

헤이스는 매킨리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매킨리는 결국 소령(Major)까지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법률을 공부하여 1867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869년부터 1871년까지는 오하이오 검사로 재직했습니다.

이후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다가 옛 상관이었던 헤이스의 보좌관이 되었고, 연방 하원 의원을 거쳐 오하이오 주지사를 역임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제25대 대통령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킨 윌리엄 매킨리, 미국 제국주의 시대를 연 제25대 대통령

대통령이 된 매킨리는 공화당의 전통에 따라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에 착수하여 평균 57%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딩글리 관세법(Dingley Tariff Act)을 제정했고, 이후 국내외의 비판 속에서도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는 미국 고유의 팽창주의 이념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의 확장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알프레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의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논조가 여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카리브해의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고, 매킨리는 이를 지원했습니다. 1898년 쿠바 연안에 정박해 있던 미군 함선 메인호(USS Maine)가 폭발해 침몰하자, 매킨리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고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합니다.

일찍이 칠해를 지배하던 해양 강국 스페인은 더 이상 미국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나라가 그 발견의 결과로 태어난 나라에게 패배한 셈이며, 상대도 되지 못한 채 무너졌습니다.

메인호 폭발 사건의 진실은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에도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빌미로 여러 차례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루시타니아 호 사건, 진주만 공습, 통킹만 사건까지, 미국은 언제나 '적국의 공격을 받고 반격한다'는 형식을 취해왔는데, 너무나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한편, 뢴트겐 박사가 발견한 X선이 스페인-미국 전쟁 중 부상자 치료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무렵 미국은 이미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같은 해 하와이는 미국에 병합되었고, 파리에서 체결된 강화 조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차지했으며, 쿠바의 일부는 영구 조차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존재하는 관타나모 기지가 바로 그때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스페인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근거로 독립을 주장했지만, 매킨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필리핀과의 전쟁(필리핀-미국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는 당연히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미국은 이를 발판 삼아 중국 대륙으로의 팽창을 노리게 됩니다.

문제는 중국이 이미 청일전쟁과 의화단 운동을 거치며 열강에 의한 분할의 시대에 들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뒤처져 있던 미국을 위해 매킨리 행정부의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는 청나라의 영토 보전을 주장하면서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요구하는 '문호개방(Open Door Policy)' 선언을 발표했고, 이는 일본 및 러시아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윌리엄 매킨리의 최후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킨 윌리엄 매킨리, 미국 제국주의 시대를 연 제25대 대통령

매킨리는 재선에 성공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지만, 그 임기를 무사히 마치지는 못했습니다.

1901년, 그는 암살당했습니다. 향년 58세.

범인은 리언 프랭크 좰고시(Leon Frank Czolgosz)라는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매킨리에 대한 개인적 평가

변호사 시절, 매킨리는 사업가 마크 해나(Mark Hanna)가 운영하던 광산의 파업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습니다. 공화당원치고는 드물게도 매킨리는 광산 측이 아닌 광부들의 편에 서서 변호했고, 훗날 그들이 변호비를 지불하려 하자 "받고 싶지 않다!"라며 단호히 사양했다고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강경했지만 자국민에게는 따뜻했던, 참으로 매킨리다운 일화입니다.

매킨리가 암살당하자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만약 이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먼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오르는 일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역사란 결국 우연의 산물입니다.

일본에 "이제는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매킨리 시대의 미국은 마침내 남북전쟁 이후의 재편기를 넘어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윽고 열강들이 정면충돌하는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킨리는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에 서 있었던 대통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