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존 퀸시 아담스, 미국 6대 대통령의 생애와 평가

미국 역사상 부자(父子)가 모두 대통령이 된 가문은 단 두 곳뿐입니다. 하나는 부시 가문이고, 다른 하나는 애덤스 가문입니다.

미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입니다.

혁명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 미국 6대 대통령의 생애와 평가

미국 초대부터 제4대까지의 대통령들은 흔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대로, 독립혁명전쟁이나 독립선언서 작성에 각각 관여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제5대 제임스 먼로 역시 혁명전쟁에 참전했지만, 존 퀸시 애덤스는 혁명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그렇다고 경험이 없어서는 아닙니다. 그는 1767년에 태어나 혁명전쟁이 발발했을 때 겨우 8살이었기 때문입니다.

퀸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매사추세츠주 출신으로, 당시까지의 미국 대통령은 버지니아 또는 매사추세츠 출신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퀸시는 아버지의 외교 임무를 따라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네덜란드의 명문 라이덴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참고로 라이덴 대학은 세계사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후고 그로티우스가 배운 곳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러시아,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실레지아 등을 거쳤습니다.

귀국 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791년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덧붙이면, 초대 대통령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대통령 대부분은 군 지휘관 또는 변호사 출신입니다. 초대 워싱턴이 전자, 제2대 애덤스가 후자였듯이, 아이젠하워나 앤드루 잭슨 같은 전쟁 영웅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의 전통입니다.

퀸시는 조지 워싱턴을 깊이 존경했으며, 유럽에서 쌓은 경험을 십분 활용해 1794년 주네덜란드 공사, 1796년 주포르투갈 공사, 1797년 주프로이센 공사를 역임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 시절에는 변호사로 지냈지만, 1802년 매사추세츠주 의회 의원, 1803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지만, 미국에서는 대학 교수나 학자가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밑에서는 주러시아 공사를 지냈습니다. 이 시기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던 때로, 퀸시는 그 참혹한 상황을 보고하여 미국에 알렸습니다. 이후 1812년 전쟁의 휴전 협상을 맡아 양국 간 헨트 조약 체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815년부터 1817년까지는 주영국 대사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존 퀸시 애덤스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자주 불립니다.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시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유럽과 아메리카 간의 상호 불간섭을 주장하는 '먼로 독트린'을 기초하고 플로리다 획득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먼로 대통령의 훌륭한 업적 상당수는 사실 퀸시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24년, 그는 미국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선거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앤드루 잭슨, 헨리 클레이 등 강력한 경쟁자들과 막상막하의 접전 끝에 승리했지만, 이는 곧 미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퀸시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경쟁자였던 헨리 클레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이 임명은 정치적 신념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부패한 거래(corrupt bargain)'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게다가 앤드루 잭슨 파벌은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로 맞섰고, 그의 정권에 '저주받은 정권'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 진영과 퀸시 진영은 역사상 최악으로 치닫는 공방전을 벌였고, 결과는 잭슨이 제7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거의 승패를 가른 것은 원주민(인디언) 정책의 차이였습니다. 퀸시는 먼로의 인디언 이주 계획을 물려받으면서도 원주민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잭슨은 그런 필요가 없다며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미국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미국의 분열

미국은 수십 년 뒤 남북으로 갈라진 남북전쟁을 겪지만, 갈등은 남북 사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부와 동부 사이에도 격렬한 갈등이 있었는데, 그 핵심 역시 원주민 정책의 차이였습니다.

남북 간의 갈등이 흑인 노예 문제, 즉 산업화된 북부와 대농장 중심의 농업에 의존하던 남부 사이의 충돌이었다면, 서부와 동부 간의 갈등은 팽창을 원하던 서부와 그럴 필요가 없던 동부 사이의 '토지'를 둘러싼 충돌이었습니다.

북부이자 동부 출신인 퀸시는 남부와 서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지만, 그것이 인도적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존 퀸시 애덤스에 대한 개인적 평가

존 퀸시 애덤스가 훌륭한 외교관이었고 유능한 국무장관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의 외교 속에서도 미국의 이익을 지켜낸 능력은 탁월하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외교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반면, 그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도 탁월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퀸시에게는 카리스마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말하자면,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었을까요?

좋은 사람이 항상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케네디와 링컨에게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능력 면에서만 보면 오히려 퀸시가 더 뛰어났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만약 그것까지 갖추었다면, 미국은 더 나은 역사를 걸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