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외교적 충돌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 가장 긴장이 고조된 순간으로 평가되며, 당시 세계는 실제로 핵전쟁으로 치닫을 뻔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배경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서로 대립하는 이념 진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소련(구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를 수호하며 양측은 경제 원조나 군사 개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각국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려고 경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강대국은 한 번도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이끄는 혁명 세력이 쿠바 혁명에서 승리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오랜 동맹국이었던 쿠바를 잃었고, 카스트로가 섬에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새로운 적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대응은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금수 조치)였으며, 이로 인해 쿠바 경제는 큰 불안정에 빠졌습니다.
미사일 위기의 전개 과정

1961년 11월, 미국은 터키에 '주피터(Jupiter)' 핵미사일 15발을, 이탈리아에는 30발을 배치했습니다. 이 무기들은 사거리가 2,400km에 달해 모스크바를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쿠바에 대한 금수 조치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카리브해 섬으로 향하는 선박 교통량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소련 국기를 단 선박의 왕래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산크리스토발 지역을 촬영했습니다. 촬영된 사진 속에는 기지 건설 현장과 설치된 핵탄두, 그리고 미사일 발사를 가능하게 할 램프 시설까지 드러났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 바로 앞에 핵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쿠바에게 이 무기들은 또다시 침략당하지 않겠다는 보증이었고, 소련 역시 미주 대륙에 무기를 배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양국 간의 격렬한 대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은 최측근 참모들과 함께 위기를 관리하며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반면 미군 참모본부는 카리브해 섬에 대한 무력 침공이나 선제 공중 폭격을 선호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쿠바 봉쇄(검역)
결국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 봉쇄를 선택했는데, 이른바 '검역(quarantine)'이라 불린 조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해군은 소련 국기를 게양한 선박들을 검문하고, 무기를 실은 선박은 본국 항구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조치는 NATO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쿠바에서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혁명을 옹호하고, 이를 내정 간섭으로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쿠바 군대도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동원되었습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1894~1971)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쿠바인들에게 섬 상공을 비행하던 미군 정찰기 편대를 격추하라고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미사일 위기의 해결
10월 26일에야 소련 측은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미국의 U-2 정찰기 한 대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면서 미군 장성들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공습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착 상황에 직면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 결국 10월 28일,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후 비공식 합의를 통해 소련은 터키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의 철수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미사일 위기의 결과
미국, 소련, 쿠바 사이의 2주간에 걸친 극도로 긴장된 관계 끝에 대립은 마침내 종식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에 직접 연락 회선이 구축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붉은 전화기(red phone)'로 알려진 통신망입니다.
이처럼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베트남전 등 여러 분쟁과 함께 세계의 두 정치 극단이 부딪힌 또 하나의 장면이었던 셈입니다.
흥미로운 사실
각국에서는 이 사건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소련에서는 '카리브해 위기', 쿠바에서는 '10월 위기', 그리고 미국에서는 '미사일 위기'라 불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