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미합중국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남부 독립 전쟁(American Civil War)'이라고도 불립니다.
북부(연방)와 남부(아메리카 연합국)가 노예제 해방 문제를 두고 충돌한 이 전쟁은 북부 연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연발 소총, 참호, 장갑함, 잠수함은 물론 항공 정찰용 기구까지 동원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이후 남북 간 가장 큰 갈등 요인이었던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양 지역의 통합이 가능해졌지만, 동시에 인종 차별 분리가 시작되어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
노예제 문제
충돌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노예제였습니다. 북부는 노예제 폐지를 옹호한 반면, 남부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상이한 식민지 배경
사실 식민지 시절부터 북부와 남부는 영국령 13개 식민지의 지리적 차이로 인해 뚜렷하게 다른 사회·경제적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북부에 건설된 식민지들은 영국과 비슷한 한랭 기후를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착민들은 자급 농업, 상업, 제조업 등 본토에서 하던 활동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반면 남부에서는 온난한 기후 덕분에 플랜테이션(농장) 체계에 기반한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대규모 단일 작물 재배, 노예 노동, 해외 시장 판매로 구성된 이 체계는 시골 귀족적인 생활 방식을 낳았습니다.
상이한 경제 정책
북부는 점차 공업화되어 간 반면, 남부는 농업 중심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독립 과정에서 양 지역의 이해관계는 피할 수 없이 충돌하게 됩니다.
북부는 보호무역주의와 노예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지만, 노예 소유주들과 남부 귀족들은 노예제 유지를 원했습니다.
결국 1860년 남부는 연방에서 탈퇴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을 선포했습니다. 북부는 이 결정을 위헌적 행위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같은 해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어느 외국도 연합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특징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은 북부가 더 공업화되어 있고 인구도 많았기 때문에 수적으로 우세하며 잘 무장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깊은 군사적 전통과 숙련된 지휘관들을 갖추고 있어 결코 쉽게 꺾을 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양측 모두 전쟁 초에는 자원병으로 시작했으나, 곧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남군은 급여와 장비가 열악했습니다. 대개 단발 소총으로 무장했고, 염소털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신발 없이 행군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약 2,200만 명이 거주하던 북부에서는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는데, 그중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18만 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약 112만 명이 전쟁 말기 연방군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인구 1,000만 명 미만에 불과했던 연합국은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모집했지만, 종전까지 남은 병력은 50만 명에 그쳤습니다.
해군 면에서는 북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헤게모니를 장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군 해군은 56,000명의 선원과 626척의 함선(전함 65척 포함)을 보유한 반면, 남군 해군은 규모가 작아 유럽산 함선 구매와 북군 함선 나포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전쟁의 전개
1850년부터 이미 북부와 남부 사이에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적대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50년 타협'이 시도되었는데, 캘리포니아는 지리상 남부에 속함에도 자유노동주(州)로 예외 처리되었습니다.
1854년에는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통과되어,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이들 주에서도 노예 노동이 허용되었습니다. 2년 후 캔자스 주민들은 노예제 반대 투표를 했지만, 남부 주도의 상원은 이 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어 1858년에는 민주당이 북부의 폐지론자파와 남부의 노예제 옹호파로 분열했고, 1859년에는 폐지론자 존 브라운(John Brown)이 반란 선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860년 북부 세력이 상원을 장악했고,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중심으로 미국 내 노예제 폐지 투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링컨이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남부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에서 탈퇴했고, 알라바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가 뒤따랐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텍사스도 연방에서 이탈했습니다.
1860년 12월,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연합국'이 등장했습니다. 대통령에는 미시시피 출신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가 선출되었고, 수도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정해졌습니다. 연방은 이 분리를 위헌 행위로 규정하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유니언(Union)'이라고도 불린 연방은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델라웨어,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켄터키, 메인,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오하이오, 오리건,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위스콘신, 그리고 콜로라도, 다코타, 네브래스카, 네바다, 뉴멕시코, 유타, 캔자스, 워싱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주요 사건
적대 행위는 1861년 4월 12일, 남군이 섬터 요새(Fort Sumter)를 공격해 점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연방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1862년부터 연방은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을 실행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남부를 포위하고, 면화·담배·식량 수출과 전략 물자 수입을 모두 차단했습니다.
같은 해 남군은 앤티텀 전투에서 패배했고, 서부 전선에서는 해군이 궤멸적으로 파괴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1863년에는 리 장군이 버지니아에서 북군을 격파하는 등 분전했음에도, 남부의 북진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패배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남부의 패색이 짙어지자 영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분쟁에서 손을 뗐습니다. 한편 서부 전선의 북군은 남부의 기반 시설을 차례로 파괴해 나갔고, 마침내 1865년 4월 10일 아메리카 연합국의 수도 리치먼드를 함락했습니다.
그러나 1865년 4월 14일, 링컨은 남부 출신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습니다. 같은 해 말, 미국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되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종결
전장에서 패배한 뒤 1865년 6월 28일 남부 장군들이 항복하면서 재건 시대가 개막되었고, 이 시기는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양측의 군사적 사상자는 사망자 60만 명, 부상자 4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흥미롭게도 이들 사상자의 약 5분의 3은 열악한 식량과 위생 환경으로 인한 질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1868년에는 수정헌법 제14조가 제정되어, 모든 미국 주가 헌법을 평등하게 준수하도록 의무화되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결과와 영향
북부만큼 산업 기반을 갖추지 못한 남부의 패배는 불가피했고, 그 후강한 정치·경제적 침체가 뒤따랐습니다. 남부의 농경지와 도시는 북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남부 주들은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노예제가 종식되었음에도 흑인 인구는 오랜 기간 차별과 분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부 남부 주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미국 사회 통합에 맞서기 위해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과 같은 인종주의 단체가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북부 지역은 남북전쟁의 수혜자였습니다. 공업 부문이 크게 확장되었고, 전쟁 후 서부 영토가 통합 국가에 편입되면서 철도, 전신선, 도시 건설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연방의 승리로 북부의 공업주의 모델이 미국의 주류가 되었고, 이는 이후 미국 경제 발전의 방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