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주의(isolationism)는 미국 역사에서 단순한 외교 정책을 넘어 국민 여론에 깊이 뿌리내린 사상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전쟁에 얽히지 말자'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당시 수많은 미국인이 고립주의를 지지하게 된 주요 배경을 살펴본다.
1. 유럽 교전국과 얽힌 문화적·민족적 유대
20세기 초 미국 인구의 상당수는 불과 50년 안에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와 그 후손이었다. 이들은 모국과의 문화적·정서적 유대를 여전히 이어 가고 있었고, 조국끼리 서로 싸우는 유럽 전쟁에 새 터전인 미국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이들은 아일랜드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영국에 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어,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돕기 위해 참전하는 데 강력히 반대했다. 독일계 미국인 역시 조국 독일과 싸우는 것을 꺼리며 반전 여론의 한 축을 형성했다.
2.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전쟁 피로감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미국인은 그 막대한 희생이 결국 유럽의 이권 다툼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며 허탈해했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여론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3. 눈부신 경제적 번영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공업 강국으로 부상했고, 유럽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는 동안 본토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은 거의 없었다. 많은 미국인은 해외 분쟁에 개입할 필요 없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4. 고립주의 여론을 반영한 법과 정책
1920~30년대 미국 정부와 의회는 고립주의 정서를 실질적인 제도로 구체화했다.
- 1924년 이민법(Immigration Act):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기존의 생활 방식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제정되었다. 이 법은 국가별 이민 쿼터(할당제)를 도입해 남유럽·동유럽 출신보다 북유럽·서유럽 출신 이민자에게 훨씬 많은 몫을 배정했다.
- 1935년 중립법(Neutrality Act): 교전 국가에 무기를 팔거나 자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했고, 잠수함 공격을 피하기 위해 미국 시민이 교전국 선박에 탑승해 여행하는 것마저 금지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처럼 미국이 전쟁에 휘말릴 명분이 되었던 상황의 재발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5. 유럽 열강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많은 미국인은 유럽 열강을 신뢰할 수 없는 세력으로 보았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유럽 강대국들이 자기들 이익만 챙긴다고 여겼고, 미국은 오히려 그들의 분쟁에서 거리를 두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퍼졌다.
6. 건국 이래 이어져 온 역사적 전통
고립주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고별 연설에서 유럽 열강과의 '얽힌 동맹(entangling alliances)'을 경계하라고 충고했으며, 그 이후 미국은 직접 공격을 받거나 국익이 즉각적으로 위협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해 왔다.
7. '유럽의 전쟁'이라는 인식
많은 미국인은 제1차 세계대전을 순수하게 유럽 내부의 분쟁, 즉 미국의 이해와는 무관한 싸움으로 여겼다. 대양 하나를 사이에 둔 먼 전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8. 국내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인식
해외 전쟁에 나서면 자원과 국가적 관심이 분산되어 빈곤, 실업 같은 시급한 국내 문제 해결이 소홀해진다는 우려도 컸다. 특히 대공황 시기에는 "미국인의 밥벌이가 먼저"라는 여론이 고립주의를 더욱 강하게 뒷받침했다.
이처럼 문화적 유대, 전쟁의 상흔, 경제적 계산, 역사적 전통이 서로 맞물리면서 고립주의는 1920~30년대 미국 사회의 강력한 주류 여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 흐름은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직접 공격을 받기 전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