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에 '존 브라운의 페리 습격'이라는 별도의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 사건은 실제로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 습격을 가리킵니다. 당시 버지니아주(현재는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속한 하퍼스 페리는 지명 자체에 '페리(나루터)'가 포함되어 있어 이름이 비슷하게 오해되곤 합니다.
하퍼스 페리 습격 사건이란?
1859년 10월 16일 밤, 급진적 폐지론자 존 브라운은 스스로 모집한 약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연방 무기고가 위치한 하퍼스 페리를 기습 점거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무기를 탈취하여 인근 지역의 노예들을 무장시키고, 전국적인 노예 반란의 도화선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습격의 경과와 실패
브라운 일행은 초기에 마을과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예상과 달리 대규모 노예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민들과 지역 민병대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로버트 E. 리 대령이 지휘하는 미국 해병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습격은 단 이틀 만에 실패로 끝났으며, 브라운의 두 아들을 포함한 여러 습격자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재판과 처형
체포된 브라운은 버지니아에 대한 반역죄, 살인죄, 노예 반란 선동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에 처했지만, 재판 과정과 처형 직전까지 보여준 침착함과 확고한 신념은 북부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를 폐지 운동의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적 의미
하퍼스 페리 습격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남북 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은 남북전쟁(1861~1865) 발발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수령 중 하나로 평가되며, 북군이 부르던 행진곡 '존 브라운의 시체'는 이 사건이 남긴 상징성을 잘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