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미국은 어떻게 게티즈버그에서 리 장군의 군대를 격파했을까? 승리 후에도 링컨 대통령이 분노한 이유

게티즈버그 전투, 북군은 어떻게 승리했나?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자,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로버트 E. 리(Robert E. Lee)가 이끄는 남부동맹군을 조지 미드(George G. Meade) 장군의 북군(연방군)이 격파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1. 압도적인 물량과 보급 능력

북군은 병력, 대포, 탄약, 식량 등 모든 면에서 남부동맹군보다 우세했습니다. 산업화된 북부의 생산력과 철도망은 전선에 끊임없는 보급을 가능하게 했고, 이러한 자원의 차이는 전투가 길어질수록 남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습니다.

2. 유리한 지형 확보와 방어 중심의 전술

첫날 전투 이후 북군은 세메터리 릿지(Cemetery Ridge)와 컬프스 힐(Culp's Hill) 같은 고지대를 확보했습니다. 높은 지대에 진지를 구축한 북군은 남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으며, 특히 마지막 날 벌어진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은 열린 평야를 가로질러 북군 진지로 전진한 남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3. 미드 장군의 침착한 지휘와 기병대의 활약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드 장군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방어 지휘에 능했습니다. 또한 북군 기병대가 남군 기병대의 측면 기동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전체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는 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서부 전선에서 빅스버그 전투를 지휘하는 중이었고, 동부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약 8개월 뒤였습니다.

승리의 기쁨 대신 분노한 링컨 대통령

흥미롭게도 게티즈버그 승리의 소식을 접한 링컨 대통령의 반응은 환호가 아니라 깊은 실망과 분노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미드 장군이 패주하는 리의 군대를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은 북군에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전투 직후 내린 폭우로 포토맥 강이 범람하여 리의 군대는 강을 건너지 못한 채 강가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미드가 즉각 공격에 나섰다면 남부동맹의 주력 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드는 신중을 기하겠다며 공격을 미루었고, 결국 리의 군대는 강물이 줄어든 틈을 타 무사히 도주했습니다.

분노한 링컨은 미드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친애하는 장군님께, 리가 도주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장군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리는 손쉽게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그를 포위했다면 최근의 다른 승리들과 더불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다만 링컨은 결국 이 편지를 발송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현장 사령관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게티즈버그는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게티즈버그의 승리가 북군에 가져온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이 승리는 북부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고, 남부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확신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같은 시기 서부 전선에서는 그랜트가 빅스버그를 함락하며 미시시피강 유역을 장악했고, 두 승리가 맞물리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완전히 북부로 넘어갔습니다.

다만 남군의 완전한 소멸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전쟁 자체는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865년 4월, 아포매톡스 코트하우스에서 리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