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과 다른 노예 폐지론자들 사이의 분열은 주로 그의 강경하고 타협하지 않는 입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개리슨은 노예의 즉각적인 해방을 주장했으며, 정치적 행동이나 정당과의 어떠한 연합도 거부했습니다. 일부 동료 폐지론자들은 그의 견해가 너무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로비와 협상을 통한 점진적 변화가 해방을 달성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습니다.
두 갈래로 나뉜 폐지 운동
이러한 노선 차이는 폐지 운동 내부에 두 개의 주요 파벌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급진파인 '개리슨파(Garrisonians)'였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적 폐지론자(Political Abolitionists)'였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와 웬델 필립스(Wendell Phillips) 등이 대표하는 정치적 폐지론자들은 정치 활동에 참여하고, 선거에 출마하며, 반노예 성향의 정치인들과 연대하는 것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개리슨의 신념: "헌법은 노예제를 옹호한다"
반면 개리슨은 미국 헌법이 본질적으로 노예제를 옹호하는 문서라고 믿었으며, 정치적 타협은 부도덕할 뿐 아니라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해방은 기존 정치 체제를 거부하고 오직 도덕적 설득, 보이콧, 직접 행동에만 의존하는 도덕 혁명을 통해서야말로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타협하지 않는 자세는 운동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느낀 일부 폐지론자들을 소원하게 만들었습니다.
1840년대, 자유당을 둘러싼 갈등 심화
개리슨과 정치적 폐지론자들 사이의 분열은 1840년대에 자유당(Liberty Party)이 등장하고 정치 참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커지면서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개리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당의 선거 참여와 비폐지주의 정강과의 타협 의지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연합이 폐지 운동의 순수성을 희석시키고 즉각 해방이라는 목표를 훼손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분열에도 불구하고 남긴 유산
분열에도 불구하고 개리슨이 폐지 운동에 끼친 영향과 해방 대의에 대한 공헌은 여전히 지대합니다. 즉각 해방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 확고한 도덕적 확신, 그리고 『해방자(The Liberator)』 신문을 통한 편집 활동은 여론을 형성하고 폐지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결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 논란이 되었던 개리슨의 타협하지 않는 방식은 운동의 방향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시민 불복종과 비폭력 직접 행동을 포함한 더 급진적인 형태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그의 집착과 타협 거부는 이후 미국에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