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페루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페루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페루'라는 이름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카랄, 모체, 나스카, 와리 문명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땅을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잉카인들은 '세상의 네 부분(타완틴수요)'을 다스린다고 자부했죠.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유럽 정복 이전의 이 땅을 '고대 페루'나 '중앙 안데스 문화권'이라 부르지만, 이 모두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가리키는 새로운 이름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페루'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그 이야기는 소문에서 시작해, 몰락한 전사 지도자, 그리고 영광을 움켜쥐었으나 운명의 외면을 받은 한 정복자로 이어집니다.

소문의 시작

이야기는 15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위대한 신대륙이자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카리브해의 섬들은 알려졌지만,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만 겨우 탐사된 상태였죠. 대륙의 크기와 형태조차 불분명했고, 지도에는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라는 표기가 가득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태평양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카리브해 연안, 현재 파나마와 콜롬비아 국경 지대에는 스페인 최초의 영구 정착지 '산타 마리아 라 안티과'가 세워졌습니다. 열대 기후의 혹독함과 원주민의 저항으로 정착민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513년, 스페인 탐험대가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던 중 마을 지도자의 아들 판키아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금을 그토록 원한다면, 너희의 욕망을 채워줄 지역을 보여주마. 하지만 너희는 너무 적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곳에는 큰 왕들이 제 땅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으니."

판키아코는 '돛단배와 노를 저어 다니는 다른 사람들이 항해하는 바다'에 먼저 도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또 다른 바다?' 당시까지 카리브해밖에 모르던 스페인인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탐험대장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원주민의 안내를 따라 밀림과 산맥을 넘어 약속의 바다, 태평양을 조망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 발보아의 일행에는 훗날 잉카 제국을 정복할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발보아는 투마코 족장으로부터 남쪽 해안을 따라가면 '사람이 짐을 싣는 동물(라마)'과 많은 황금이 있다는 정보를 얻습니다. 투마코가 진흙으로 빚어 보여준 라마의 형상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파나마에 라마가 없던 점을 미루어, 당시 이미 에콰도르, 툼베스, 페루 친차 지역 상인들이 태평양을 오가며 교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보아는 남쪽의 신비한 정복을 꿈꿨으나, 식민 당국과의 권력 다툼 끝에 재판을 받고 참수당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전설의 전사, 비루(Birú)

발보아의 발견은 탐험 열기를 부채질했습니다. 하지만 남쪽의 정글, 오늘날 '다리엔 갭(Darién Gap)'으로 불리는 지역은 너무나 험난해 현대에 이르러서도 팬아메리칸 하이웨이의 유일한 미개통 구간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탐험 중, 프란시스코 베세라 선장은 '비루'라는 강력한 전사 족장이 동명의 지방을 다스린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베세라는 늪지와 모기떼, 미로 같은 식생에 가로막혀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는 데 그치고 철수했습니다. 귀로에 가스파르 데 모랄레스 선장과 마주친 베세라는 비루 이야기를 전했고, 모랄레스는 직접 비루의 땅으로 진격했다가 승패 없는 전투 끝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돌아왔습니다. 산타 마리아 주민들은 비루를 찾는 일이 불필요한 화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스크인의 호기심,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

세월이 흐르고 스페인인들은 카리브해의 산타 마리아를 버리고 태평양 연안에 '파나마'시를 새로 건설했습니다. 북쪽 정글이 덜 험하고 약탈 수익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1523년, 원주민 언어에 능통한 바스크인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가 총독의 평화 사절로 파나마 남쪽 추차마 마을에 파견됩니다. 그곳 원주민들은 '카시케 비루(족장 비루)'의 카누가 마을을 습격하는 계절이라 항해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다시금 들려온 전설의 이름. 안다고야는 이전 탐험가들의 실패를 알면서도, 정글을 피하고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새로운 전략으로 비루의 실체를 확인하려 나섰습니다.

일주일간 순조롭게 남진하던 일행은 한 강 하구에 이르렀고, 안다고야는 그곳이 비루 영토의 심장부로 통함을 직감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전설 속 인물, 현재 콜롬비아 초코 주 일대를 다스리던 실존하는 '전쟁 군주' 비루와 조우했습니다. 전투와 공성전 끝에 스페인 무기와 전술이 승리를 거두었고, 안다고야는 비루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비루는(어느새 친구가 된 듯) 정글이 끝나고 높은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막강한 왕이 다스리는 보물 가득한 나라가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발보아가 꿈꾸던 바로 그 남방의 왕국, 잉카 제국이었습니다.

좌절

그 왕국은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중앙 안데스에는 와이나 카팍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콜롬비아 파스토 산맥부터 칠레 중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이르는 전콜럼버스 아메리카 최대의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비루의 땅은 잉카 영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우림 지대는 '태양의 아들들'인 잉카인들의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비루가 잉카를 알았던 건, 최소 20세기 동안 태평양 연안을 오가며 직물과 산호조개(손딜루스, 스트롬부스) 등을 교역해온 상인들 덕분이었습니다.

안다고야와 비루 일행은 산후안 강(콜롬비아)에 도달했습니다. 안다고야는 삼각주를 직접 답사하며 대형 선박이 정박할 천연 항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먼 훗날 보강 병력과 물자를 실은 배가 들어올 항구를 마련하려는 큰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위와의 충돌로 카누에서 튕겨 나간 안다고야는 무게 갑옷 탓에 익사 직전까지 갔고, 아이러니하게도 비루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몇 시간 뒤 구조되었으나 병을 얻은 안다고야는 임무를 중단하고 파나마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름의 탄생

실패했음에도 안다고야는 엄청난 이야기와 금, 그리고 산 증인 비루를 데리고 파나마로 돌아왔습니다. 스페인 법에 따라 정복자는 왕실 몫 20%('왕실 5분의 1')을 제하고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523년 7월 23일, 파나마 제련소에서 작성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파나마 시, 제련소에서…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가 페루(Peru) 지방에 다녀와서, 후안 가르시아 몬테네그로가 감찰관으로 동행하여, 그들이 페루에서 가져왔다고 진술한 금을 신고하다."

역사상 '페루'라는 단어가 한 '지방(Province)'을 지칭하며 문서에 등장한 최초의 순간입니다. 1523년 이미 안다고야가 다녀온 지역이 '페루'로 불리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그 어원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등장한 가장 유사한 단어는 족장의 이름 '비루(Birú)'입니다. 과연 관련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훗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1549)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 비루(Birú)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나중에 페루(Peru) 땅을 부르게 되었는데, 'b'를 'p'로 바꾸어 발음한 것이다."

안다고야 본인도 자신의 연대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페루라 불리는 영주들의 큰 지방을 발견, 정복, 평정하였으며, 그 앞의 모든 땅이 이곳에서 이름을 얻었다."

이후 파나마 이남의 모든 미탐사 지역은 '페루'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콜롬비아 족장의 잘못 발음된 이름이, 한동안 탐험 대상인 대륙 전체를 뜻하는 '미지의 땅'의 동의어가 된 셈입니다.

페루의 크기

부상으로 말을 탈 수 없게 된 안다고야는 더 이상 탐험을 이끌 수 없었고, '페루 정복자' 자리는 공석이 되었습니다. 파나마 주민들은 그의 모험을 화젯거리로 삼았을 뿐, 북쪽 니카라과 정복이라는 더 안전하고 수익 좋은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때 발보아와 함께 태평양을 처음 본 베테랑,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나섰습니다. 안다고야 귀환 1년 후, 그는 신비의 남방 국가 정복을 기획했습니다. 피사로의 3차례 항해, 잉카 내전 이용,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 포로, 안데스 토착 세력과의 연합을 통한 절대 권력 장악 등은 잘 알려진 역사입니다.

1541년 피사로가 사망할 무렵, 안다고야가 '발견'했던 모호하고 광활한 '페루'의 경계는 재정의되었습니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페루'는 키토(에콰도르)에서 플라타(현재 볼리비아 수크레)까지를 아우르지만, 정작 안다고야가 다녀온 콜롬비아 초코 지역은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즉, 안다고야의 페루는 역사적 페루에서 배제된 것입니다.

이름의 주인공들, 그 후

비루는 파나마로 끌려가 스페인 왕의 신하가 되겠다고 선서했지만, 이후 고국으로 돌아갔는지, 중미에 남았는지, 장수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패배자의 운명은 항상 승자의 의심스러운 기록, 역사의 변두리에만 남겨집니다.

안다고야는 긴 요양 끝에 회복해 중미에서 여러 원정을 더 이끌었고, 파나마 시장까지 지내며 비루와의 모험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잉카 땅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보물선과 황금으로 치장된 궁전, 포장된 산길 이야기는 그를 자극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콜롬비아 산후안 강으로 돌아가, 과거 항구를 찾다 실패했던 그곳에서 마침내 천연항을 찾아 '부에나벤투라'시를 건설했습니다. 욕심이 과해 국경 분쟁(피사로의 부장 베날카사르와)에 휘말려 스페인까지 가서 해명해야 했고, 귀국길에 페루 반란 진압군(페드로 데 라 가스카 휘하)에 합류해 25년 만에 진짜 '페루' 땅을 밟게 됩니다.

툼베스 상륙, 카하마르카 방문, 잉카의 포장도로 행군, 쿠스코의 돌 사원(이미 반쯤 허물어지고 금박도 벗겨진) 목격…. 늦게나마 임무를 완수하고 반란을 진압한 그는 상페루(볼리비아) 임무 후 쿠스코로 돌아왔으나, 악화된 건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1548년, 오래된 상처가 도져 그가 생을 마감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의 잘못된 발음 덕분에 '페루'라 불리는 나라의 중심부였습니다.

참고 문헌 및 출처

이 주제를 학문적으로 처음 심층 다룬 이는 라울 포라스 바레네체아입니다. 그는 16세기부터 이어진 수많은 추측(카리브어 기원설, 케추아어 기원설(블라스 발레라), 성경 지명 '오피르' 유래설(페르난도 데 몬테시노스), 비루 강 유래설(오비에도, 가르실라소), 비루 계곡 유래설(모체 문화) 등)을 강력한 논리로 배제하고, 열쇠가 안다고야임을 입증했습니다. (저서 '페루의 이름(El Nombre del Perú)' 참조)

포라스도 몰랐던 문서(본문 인용 제련소 문서)가 1979년 미겔 마르티코레나 에스트라다에 의해 인도 아카이브(Archivo General de Indias)에서 발견되어 '바스크인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 페루 이름의 창안자'란 논문으로 발표되며 안다고야의 '명명자' 역할이 확증되었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델 부스토는 '페루 해양사'와 '피사로'에서 안다고야의 경로를 재구성하고 비루 관련 기록의 진위를 가렸습니다. 안다고야 자신의 연대기 '페드리아스 다빌라의 티에라 피르메(카스티야 델 오로) 지방에서의 사건 관계, 남해 발견과 페루 및 니카라과 해안에서의 일들'이 1차 사료이며, 라스 카사스의 '인도사(Historia de las Indias)'도 발보아, 안다고야, 베세라, 모랄레스의 기록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글: 파블로 이그나시오 차콘 (Pablo Ignacio Chac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