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과라니 인디언: 브라질 최대 원주민의 문화, 언어, 토지 분쟁의 역사

과라니(Guarani) 인디언은 인구 수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큰 원주민 집단입니다. 이들은 투피-과라니(Tupi-Guarani) 어족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오늘날에도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과라니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브라질 내에서 과라니족은 마투그로수두술(Mato Grosso do Sul), 상파울루, 파라나, 히우그란지두술, 리우데자네이루, 이스피리투산투, 파라, 산타카타리나, 토칸친스 등 여러 주에 걸쳐 거주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통계지리원(IBGE)에 따르면 브라질에만 약 5만 7천 명의 과라니가 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에도 과라니 원주민들이 거주합니다. 가장 많은 과라니가 사는 나라는 볼리비아로 약 7만 8,300명이며, 파라과이에는 약 4만 1,200명, 아르헨티나에는 약 6,500명이 살고 있습니다.

과라니 인디언의 특징

과라니족은 카이오와(Kaiowá), 음비아(Mbya), 냐데바(Ñandeva)의 세 하위 집단으로 나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바(avá), 치리파(chiripá), 카잉구아(kainguá), 몬테세스(monteses), 바티콜라(baticola), 아피테레(apyteré), 템부쿠아(tembukuá) 등으로도 불립니다.

각 집단은 문화 표현 방식, 사회·정치 조직, 언어, 종교 실천 방식에서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과라니족은 전통적으로 채집과 수렵으로 생계를 꾸려 왔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테코하(tekoha)', 즉 '땅'이라 불리며, 그들은 스스로를 자신이 밟고 서는 대지의 연장선으로 여깁니다.

과라니 인디언: 브라질 최대 원주민의 문화, 언어, 토지 분쟁의 역사

이러한 테코하 개념은 브라질에서 과라니족이 겪는 대부분의 토지 분쟁의 핵심에 자리해 있습니다.

과라니의 문화

'위대한 민족'으로도 불리는 과라니 인디언들은 창조신 투파(Tupã)가 '말씀'을 통해 땅을 경외하도록 자신들을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과라니인 냐만두(Ñamandú)는 대지를 자신의 잠자리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과라니의 언어

과라니어는 투피-과라니 어파에 속하며, 이 어파에서는 21개의 언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원주민 포교를 위해 과라니어를 배웠고 문법서를 펴내면서 언어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과라니어는 남미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원주민 언어로, 파라과이 인구의 약 60%가 사용합니다. 마투그로수두술의 국경 지역 학교에서는 이 언어를 교육 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과라니 인디언의 풍습

사회 조직과 노래는 과라니족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표현입니다. 그들에게 땅, 즉 테코하는 가족의 일부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과라니족은 노래를 통해 신들에게 자신들이 지상에 존재함을 알린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비의 부족이나 과다 같은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데에도 활용됩니다. 노래는 호리병박을 악기로 만들어 연주하는 소리에 맞춰 불려집니다.

과라니 인디언의 역사

이주는 과라니족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토양을 재생하고 생존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채집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유랑 습관은 이미 2천 년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적 특성은 식민지화로 인해 끊기게 됩니다. 유럽인들이 도착한 이후 과라니 집단들은 공격, 학살, 노예화를 피해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토가 점령되면서 더 이상 이주할 땅이 사라졌고, 일부 집단만이 유랑의 전통을 간신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마투그로수두술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공격이 반복되고 있으며, 피해의 대부분은 음비아, 카이오와, 냐데바 집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주에서는 원주민 영역이 목장, 대두 농장, 사탕수수 밭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주의 중단은 1864년부터 1870년까지 벌어진 파라과이 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영토는 점령과 경제적 착취를 보장하기 위해 재편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처음 개발된 작물 중 하나는 지금도 널리 소비되는 마테차의 원료인 예르바 마테(yerba mate)입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대두와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농업 기계화가 시작되었으며, 이 작물들은 오늘날까지 이 지역 농업의 주요 수출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테 라란제이라 회사

1882년, 브라질 정부는 예르바 마테 재배를 위해 과라니족이 거주하던 영토를 할양했습니다. 이 요청은 토마스 라란제이라(Thomas Larangeira)가 했으며, 그는 1892년 마테 라란제이라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영토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은 심각한 건강 문제에 시달렸고, 그 사회적 충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라니 원주민 보호구역

상황은 1943년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1882~1954) 대통령이 도우라두스 국립농업식민지 설립 법령에 서명하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 정책의 목적은 타 지역 및 외국에서 온 이주민 가족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서부 개척 운동'으로 알려진 지역 개발의 또 하나의 시도였습니다.

이후 반복적인 이주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과라니족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습니다.

1915년부터 1928년 사이 인디언보호국(SPI)은 오늘날 마투그로수두술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 과라니족을 수용하기 위한 8개의 토지를 책정했습니다. 총면적은 약 1만 8천 헥타르였습니다.

이 전략은 좁은 영토 안에 원주민들을 가두어 주변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보호 구역 중심의 체계는 1970년대 지역에 단일작물 재배가 강요되면서 붕괴되었습니다. 마투그로수두술은 브라질 최대의 대두 생산지 중 하나입니다.

이 착취 모델은 농약 사용과 기계화로 인한 토지 황폐화를 초래했습니다. 지역의 생물 다양성은 훼손되었고, 원주민들의 이주는 계속되었습니다.

카이오와와 과라니 인디언들은 저항에 성공한 집단이지만, 동시에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연방 정부는 석유 위기 극복을 위해 에탄올 연료의 공급망을 구축하는 프로알쿨(Proálcool)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마투그로수두술에서 원주민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노예 노동에 가까운 착취에 대한 고발 사례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과라니와 카이오와족은 11개의 전통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이들 지역의 총면적은 2만 2,400 헥타르이며, 소유권은 1988년 헌법 이후 공식 승인되었습니다.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의 전통 영토로 확인된 땅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분쟁의 종결은 연방 정부의 승인 이후에야 가능하며, 현재도 원주민과 지역 지주들 간의 교착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마을 인근에서는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2006년 상반기까지 이 지역에서만 400명의 원주민이 살해당했습니다.

도우라두스(Dourados)의 원주민 보호구역은 3,500 헥타르의 면적을 차지하며, 서로 다른 집단 출신 1만 2천 명이 함께 거주합니다. 사회적 배경이 다른 집단들이 공존하다 보니 내부 갈등도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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