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포르투 자유 혁명(1820): 포르투갈 헌정 운동과 브라질 독립의 씨앗

포르투 자유 혁명(Revolução Liberal do Porto)은 1820년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 도시 포르투에서 일어난 입헌주의 운동이다. 혁명 세력은 여러 요구 가운데서도 헌법의 제정과 브라질에 머물러 있던 포르투갈 왕실의 귀환을 내걸었다.

역사적 배경

포르투 자유 혁명(1820): 포르투갈 헌정 운동과 브라질 독립의 씨앗

'왕립 의회(Cortes) 대표단의 호위를 받으며 1821년 7월 4일, 브라질에서 돌아온 주앙 6세 국왕이 웅장한 테레이루 두 파수 광장에 상륙하다'

1808년 포르투갈 왕가는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피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브라질로 천도했다. 그러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이미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뒤였고, 더 이상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빈 회의 기간 동안 유럽 각국 정부의 대표들은 포르투갈 특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왕국을 통치하는 국왕에게는 회의에서 발언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주앙 6세는 1816년 브라질을 연합 왕국의 일원으로 격상시켰다. 법적으로 브라질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왕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들이 누려 온 식민지 무역 독점권이 깨졌고, 이제 브라질 출신 상인들도 본국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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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혁명

배경

주앙 6세가 부재하는 동안 포르투갈은 영국의 섭정 아래 놓여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국왕이 곧 귀국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주앙 6세는 귀국을 계속 미루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브라질의 땅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유럽 궁정과 열강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결국 1817년에는 리스본에서 프리메이슨 회원과 육군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의 포르투갈 점령에 반대를 선언하고 스스로 왕국의 섭정임을 선포했다. 이 모의는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당시 포르투갈 전역에는 팽팽한 정치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포르투의 자유주의 운동

포르투 자유 혁명(1820): 포르투갈 헌정 운동과 브라질 독립의 씨앗

포르투 자유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 자유의 여신이 폭정을 짓밟고, 군인과 시민들이 '헌법'을 요구하는 깃발을 들고 있다.

포르투에서는 왕실이 브라질에 계속 머무는 데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세력이 '왕국 최고 정부 잠정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는 성직자, 귀족, 군부 인사들과 포르투갈 북부 도시들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유럽의 군주와 민중들에게 보내는 포르투갈 국민 선언문'을 발표하여 국왕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의 제정과 포르투갈 상업의 회복을 요구했다.

운동은 다른 도시들로 번져나갔고, 9월 28일에는 입헌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1821년 1월 포르투갈 의회(Cortes)가 소집되어 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 같은 시기 주앙 6세는 가족 일부와 수행 귀족들을 대동하고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맏아들 페드루(Dom Pedro)는 섭정왕자 신분으로 브라질에 남았다. 이는 아마도 주앙 6세의 마지막 중대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아들을 그 땅에 남겨둠으로써 그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사이의 유대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포르투 혁명의 결과

  •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의 귀환
  • 포르투갈 최초 헌법의 작성과 공포
  • 포르투갈 절대왕정의 종식
  • 브라질 독립을 이끌 페드루를 중심으로 한 브라질 엘리트층의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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