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의 항해와 대항해시대의 시작

흔히 '아메리카의 발견'이라 불리는 사건은 1492년 10월 12일, 제노바 출신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이곳에 진출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원정은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라 불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 땅에 이미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발견'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널리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방 무역로를 찾아서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후, 튀르크는 유럽과 동방 간의 상업 활동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지중해를 우회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는 일이 유럽 여러 나라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적극적인 해양 원정을 주도하며 아조레스 제도, 마데이라 제도 등 대서양의 여러 섬과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항해를 본격화했습니다.

한편 카스티야 왕국 역시 바다 진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두 왕국은 이미 발견된 땅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을 나누기 위해 여러 차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494년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 조약은 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 양국의 영역으로 분할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원정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의 항해와 대항해시대의 시작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제노바 출신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한다는 구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즉,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 한 것입니다.

이 항로 구상은 피렌체의 학자 파올로 토스카넬리(1397~1482)가 작성한 지도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콜럼버스는 먼저 포르투갈의 주앙 2세(1455~1495)에게 이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은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며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건너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시 통합된 스페인 왕국 내부에서도 카스티야 귀족 일부는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을 지속하자는 입장이었고, 다른 일부는 이른바 '신세계' 개척에 위험을 감수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7년에 걸친 회담과 설득, 그리고 궁정의 음모 끝에 콜럼버스는 마침내 원정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1492년 8월 3일, 두 척의 카라벨선인 니냐호와 핀타호, 그리고 배 산타마리아호를 이끌고 출항했습니다.

승선한 선원은 총 90명이었으며, 이들은 약 두 달 뒤인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고, 이후 쿠바와 산토도밍고(히스파니올라섬)에도 도착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에 도달했다고 확신했으며, 인도 시장에 닿기 위해 네 번을 더 항해했습니다. 그는 끝내 자신이 아시아에 온 것으로 믿었지만, 그의 원정 결과 안틸레스 제도와 중앙아메리카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대륙,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의 항해와 대항해시대의 시작

새로운 땅이 단순한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임이 처음 규정된 것은 1504년, 스페인에 고용된 피렌체 출신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사실은 1513년 누녜스 데 발보아(1476~1519)가 중앙아메리카를 육로로 횡단하여 태평양에 도달하면서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이후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뮬러(1470~1520)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지도에 America(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이 '신세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되었습니다.

한편 1519년에는 포르투갈 출신 항해사 페르낭 드 마젤란(1480~1521)이 인류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에 나섰습니다.

포르투갈 국왕에게 외면당한 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1500~1558)의 밑에 들어갔고, 원정대는 카디스를 출발하여 카나리아 제도, 헥시피(브라질 헥시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항해했습니다. 이후 그가 통과한 해협은 그의 이름을 따 '마젤란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원정대는 아시아, 특히 필리핀과 몰루카 제도(향료 제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마젤란은 1521년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충돌 중 목숨을 잃었지만, 항해 자체는 이듬해인 1522년 스페인인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1476~1526)와 생존자 18명에 의해 완주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배경과 발전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의 항해와 대항해시대의 시작

대항해시대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튀르크가 동방 무역로를 차단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각국 군주들에게 왕권을 정당화하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유럽은 동방으로부터 설탕, 금, 장뇌, 도자기, 보석, 그리고 후추·정향·계피·육두구·생강 같은 향료와 각종 의약품, 연고, 향수, 방향유를 공급받았습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운반되던 이들 상품은 아랍 상인들이 육상 대상(캐러밴)을 통해 이탈리아까지 운송했으며,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같은 도시가 그 경유지였습니다.

중개자 역할을 하던 이들 도시는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고, 이에 각국 군주들은 이 독점 체제를 타파하려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무역로가 막힌 것 외에도, 국가와 부르주아의 연합은 대항해를 촉진한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군주와 시민 상공인 모두 항해 원정을 지원할 기술 개발에 자금을 대는 것이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두 개의 돛대와 네모난 돛을 단 소형 선박인 바르카류가 등장했고, 이어 세 개의 돛대를 갖춘 카라벨선이, 마지막으로 더 정교하고 키(舵)를 갖춘 대형 선박이 개발되었습니다.

항해에 필수적인 나침반은 중국에서, 아스트롤라베는 아랍 지역에서 전래되어 원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축적된 항해 지식, 중앙집권적 국가의 뒷받침, 사업 확장을 원하는 부르주아, 그리고 기독교 신앙 확산을 바라던 가톨릭 교회의 열망이 어우러져 유럽의 아메리카·아시아 항해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항해 연대기

항해사연도주요 업적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2~1493바하마 제도 도착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3~1496과들루프,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8~1500베네수엘라 해안
알론소 데 오헤다1499베네수엘라 탐사
비센테 야녜스 핀손1500브라질 북부 해안 도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502온두라스
누녜스 데 발보아1501'테라 피르마'(남미 대륙) 발견
누녜스 데 발보아1513태평양 발견
폰세 데 레온1513플로리다(미국) 도착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1516아르헨티나(라플라타강) 발견
페르디난드 마젤란1519지구 일주 항해 시작, 칠레 발견
페드로 데 알바라도1521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정복
프란시스코 데 오렐라나1535아마존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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