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폼발 후작: 리스본을 재건하고 포르투갈을 개혁한 계몽전제주의자

폼발 후작(Marquês de Pombal)은 포르투갈의 외교관이자 총리였던 세바스티앙 조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가 널리 알려진 이름입니다.

그는 '계몽전제군주'로 불리는 통치자 세대에 속하며, 포르투갈 왕국과 그 식민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애

마누엘 드 카르발류 이 아타이드(Manuel de Carvalho e Ataíde)와 테레자 루이자 드 멘동사 이 멜루(Teresa Luísa de Mendonça e Mello)의 아들로, 1699년 5월 13일 리스본에서 태어나 1782년 5월 8일 폼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코임브라 대학교 법학부에서 1년간 공부한 뒤 학업을 접고 군에 입대했지만, 군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여가 시간을 활용해 역사, 정치, 입법을 독학하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를 역임한 그는, 국왕 조제 1세(D. José I)의 신하로 발탁된 후 진정한 정치적 부상을 이룹니다. 1755년 리스본을 초토화시킨 대지진 이후 도시를 기획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의 재건 계획이 가져온 성과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제 1세는 그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이후 그는 1759년 오에이라스 백작(Conde de Oeiras), 그리고 마침내 1769년 폼발 후작(Marquês de Pombal) 칭호를 받게 됩니다.

폼발 후작은 절대주의가 국가를 통치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브라간사(Bragança) 왕가에 권력을 점차 집중시켰고, 특히 타보라(Távora) 가문을 비롯한 포르투갈 구귀족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왕 조제 1세가 암살 위기를 겪었을 때, 폼발 후작은 곧바로 타보라 가문이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속하게 진행된 조사 끝에 그는 구귀족의 핵심 인물인 타보라 가문 일부와 아베이루 공작(Duque de Aveiro)의 체포와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왕권에 맞서 음모를 꾀하려던 귀족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개혁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폼발 후작의 통치는 소위 폼발 개혁(Reformas Pombalinas)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책으로 특징지어집니다.

폼발 후작은 포르투갈이 경제적으로 영국에 종속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두오루 상부 포도밭 농업 회사(Companhia para a Agricultura das Vinhas do Alto Douro) 설립
  • 알가르브 왕립 어업 총회사(Companhia Geral das Reais Pescas do Reino do Algarve) 설립
  • 새로운 세금 징수 관리 체계 도입
  • 원주민(인디오) 노예화 금지
  • 종교재판소 시절 유대인 개종자에 대한 차별 금지

그는 교육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까지 가톨릭 교회가 장악하고 있던 교육을 현대화하고자 의학부와 수학부 등 새로운 학부를 설립하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브라질에서의 폼발 개혁

식민지 브라질에서 폼발 정부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그랑파라이마란량 회사(Companhia do Grão-Pará e Maranhão) 설립
  • 페르남부쿠이파라이바 총회사(Companhia Geral de Pernambuco e Paraíba) 설립
  • 세습 카피타니아(capitania hereditária) 제도의 최종 폐지
  • 브라질의 포르투갈 부왕령(Vice-Reino)으로의 승격
  • 살바도르를 대체하여 리우데자네이루를 식민지의 새 수도로 지정
  • 예수회 추방

이러한 개혁은 브라질 광업 활동의 생산과 통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가 일어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회 추방

폼발 후작은 예수회가 원주민들이 포르투갈에 저항하도록 부추긴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를 명분으로 삼아 그는 1759년, 포르투갈 본토에서 이미 단행했던 것처럼 브라질에서도 예수회를 추방하고 해당 수도회의 자산을 몰수했습니다.

예수회는 스페인, 파르마, 양시칠리아 왕국,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추방당했으며, 결국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수도회 자체가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정치 생명의 끝

폼발 후작의 몰락은 1777년 국왕 조제 1세가 서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위를 계승한 마리아 1세(D. Maria I)는 그를 권력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새로운 군주는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타보라 가문을 사후에 복권시켰습니다.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던 가문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에게 횡령과 권력 남용을 포함한 여러 범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그 형벌로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고령을 고려한 여왕은 그가 자신의 저택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고, 폼발 후작은 5년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