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바 가투는 누구인가?
마누엘 드 보르바 가투(Manuel de Borba Gato)는 브라질 상파울루 출신의 개척자(반데이란트)로, 금광을 발견했으며 사바라(Sabará)에서 판사 직위를 맡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엠보아바스 전쟁(Guerra dos Emboabas)에 참전했으며, 에메랄드 사냥꾼이라 불린 유명한 개척자 페르낭 디아스 파이스(Fernão Dias Pais)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

보르바 가투의 생애
마누엘 드 보르바 가투는 1649년 상파울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Terceira) 출신으로, 1630년대 당시 상 비센트 카피타니아에 정착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주앙 보르바 가투(João Borba Gato)는 깃발 원정(반데이라)에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삼촌 벨키오르 드 보르바 가투(Belchior de Borba Gato) 역시 상파울루 내륙 지방에서 개척 활동을 벌였으며, 이후 예수회에 대한 반발 운동과 아마도르 부에노 옹립 사건(1641년)에도 관여했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 마누엘 보르바 가투는 자연스럽게 개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페르낭 디아스 파이스의 딸 마리아 라이치(Maria Leite)와 결혼했습니다.
개척자로서의 삶
1674년부터 1681년까지 마누엘 보르바 가투는 장인과 함께 상파울루와 마투 그로수 일대의 숲을 오가며 탐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1681년 디아스 파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미나스제라이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귀족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그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숲속으로 도피한 그는 우연히 리우 다스 벨라스(Rio das Velhas)에서 금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금맥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당국과 거래하여 죄를 사면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698년, 그는 사면과 함께 중위 계급을 받게 됩니다. 이후 그는 강변 지역과 사바라 산맥 일대에 귀금속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후 광산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사법 질서의 확립, 금광 구획 분배, 포르투갈 왕실에 납부할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총괄했습니다.
보르바 가투는 여러 채굴 허가권과 광산을 친지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전해지며, 상파울루 총독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엠보아바스 전쟁 기간에는 리우 다스 벨라스 마을(현재의 사바라) 주민들을 규합해 외지 출신 실력자 마누엘 누네스 비아나(Manuel Nunes Viana)에 맞섰습니다.
보르바 가투는 심지어 공식 결정 사항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해 누네스 비아나의 마을 퇴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개척자들과 새로 이주한 사람들을 대립시킨 전쟁의 도화선이 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보르바 가투는 1718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은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보르바 가투 동상과 그를 둘러싼 논란
라포주 타바레스(Raposo Tavares), 페르낭 디아스 파이스, 보르바 가투 같은 개척자들은 상파울루 시와 주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 세 인물의 이름은 거리와 도로명에 새겨져 있으며, 파울리스타 박물관(Museu Paulista)에는 그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개척자들의 원정 덕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정한 경계선은 확장되었고, 포르투갈령 아메리카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군주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간의 경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 역사학계는 개척자들의 역할을 재평가해 왔습니다. 이들 원정의 목적 중 하나는 원주민을 사냥해 노예로 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마을 하나가 통째로 파괴되고 주민들은 영원히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보르바 가투는 파울리스타 박물관의 동상 외에도, 상파울루 산투 아마루(Santo Amaro) 지구에 높이 10미터, 무게 20톤에 달하는 대형 기념비를 갖고 있습니다. 1963년 줄리우 게라(Júlio Guerra)에 의해 건립된 이 기념비는 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쓴 채 총을 든 탐험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는 시민 일부가 미덕이 의심스러운 인물에 대한 추모는 부적절하다며 기념비 철거를 제안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후대들에게 깊은 성찰의 계기를 남겼습니다.
2020년에는 다시금 기념비에 분무 페인트가 뿌려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원주민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긴 인물이 공공 공간에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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