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인 7월 27일, '바다의 기사(El Caballero de los mares)' 미겔 그라우(Miguel Grau)가 태어났습니다. 이 인포그래픽을 통해 페루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민 영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생애
미겔 그라우는 1834년 7월 27일 피우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 출신의 후안 마누엘 그라우 이 베리오(Juan Manuel Grau y Berrío) 중령이었고, 어머니는 피우라 출신의 마리아 루이사 세미나리오 이 델 카스티요(María Luisa Seminario y del Castillo)였습니다.
그는 9세에 상선 '테스쿠아(Tescua)'호를 타고 처음 바다에 나섰으며, 1844년부터 상선을 타고 항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겨우 19세에 해군 생도가 되어 처음으로 군복을 입었습니다.
1866년 2월에는 코르벳함 '우니온(Unión)'호를 지휘하며 압타오 해전에 참전했습니다. 1867년에는 돌로레스 카베로 누녜스(Dolores Cabero Núñez)와 결혼하기 위해 현역에서 잠시 물러났고, 슬하에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868년 해군에 복귀하여 감시함 '우아스카르(Huáscar)'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0월 8일은 앙가모스 해전에서 그라우가 남긴 영웅적 행적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출처: 페루 해군
정치 활동
미겔 그라우는 정치 분야에도 진출했습니다. 1876년 시민당 소속으로 파이타 지역구 의원이 되었고, 두 번의 임기 동안 '우아스카르'호의 지휘관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우아스카르'호 함장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바다의 기사'
그라우가 '바다의 기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적에게까지 보여준 연민과 예우 덕분입니다. 1879년 5월 21일, 감시함 '우아스카르'호와 프리깃함 '인데펜덴시아(Independencia)'호로 구성된 페루 해군 분대는 이키케 항구를 봉쇄하던 칠레 함선들과 교전했습니다. 코르벳함 '에스메랄다(Esmeralda)'호를 침몰시킨 후, 그라우는 패배한 배의 생존자들을 반드시 구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앙가모스 해전
1879년 10월 8일, 페루 분대는 칠레군에게 포위됩니다. 그라우는 '우니온'호 함장에게 승무원들의 생존을 우선하라고 명령하고 오직 '우아스카르'호만 남아 싸웠습니다. 결국 '코크란(Cochrane)'호에서 발사된 포탄이 '우아스카르'호에 직격하면서 그라우는 전사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인 1879년 10월 8일에 벌어진 이 해전에서 페루의 우아스카르호와 우니온호는 칠레의 코크란호, 블랑코 엔칼라다호, 로아호, 코바돈가호와 맞섰습니다. 이 전투에서 위대한 제독은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굳건한 인품 덕분에 오늘날까지 칠레인과 페루인 모두에게 '바다의 기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적의 경의
'우아스카르'호를 나포하고 페루 영웅의 유해를 확인한 뒤, 칠레 사령관 갈바리노 리베로스(Galvarino Riveros)가 작성한 보고서는 적 함대가 그라우에게 품었던 깊은 존경심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페루 해군 소장 미겔 그라우 선생의 서거는 이 함대 전체에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함대의 지휘관과 장교들은 저 훌륭한 항해사의 애국심과 용기에 충분한 경의를 표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상관에게 보낸 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그라우의 기사도 정신은 에스메랄다호 함장 아르투로 프라트 차콘(Arturo Prat Chacón)의 미망인 카르멜라 카르바할(Carmela Carvajal)을 향한 배려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프라트는 우아스카르호 갑판에서 전사했는데, 그라우는 그의 아내에게 조문 편지를 보내 남편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유언장 등 개인 소지품과 함께 전리품으로 삼을 수도 있었던 검까지 돌려보냈습니다.
영웅의 품격
미겔 그라우 세미나리오의 애국심은 1879년 국회의원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페루 해군에 복귀하여 우아스카르호를 지휘하기로 결심하면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가 열세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는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고 적에게조차 명예롭게 대했습니다.

출처: 페루 해군, 합동참모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