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제정기(두 번째 통치)는 1840년 7월 23일부터 1889년 11월 15일까지, 브라질이 도무 페드루 2세(D. Pedro II, 1825~1891)의 통치를 받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브라질 각 주 간의 상대적인 평화,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 그리고 파라과이 전쟁(1864~1870)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제2제정기는 1889년 11월 15일 군부 쿠데타, 즉 공화주의 쿠데타와 함께 막을 내립니다.
제2제정기 개요
제2제정기는 브라질이 하나의 국가로서 확고히 자리 잡은 시기입니다.
당시 브라질의 정치 체제는 입헌 군주제 하의 의원내각제였습니다. 황제는 세 명의 후보 명단을 바탕으로 각료평의회 의장(수상에 해당하는 직위)을 임명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커피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브라질 최대 수출품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른바 '검은 금'이라 불린 커피의 유통을 개선하기 위해 최초의 철도와 증기선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커피 호황 속에서 브라질은 딜레마에 직면합니다.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도무 주앙 6세 정부 시절부터 브라질은 노예제 폐지를 약속해 왔지만, 폐지는 곧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기에 커피 엘리트들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노동력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또한 제2제정기 동안 브라질은 남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력 충돌인 파라과이 전쟁과 마주하게 됩니다.
마침내 농촌 엘리트와 군부의 지지를 잃은 군주제는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고, 황실은 국외로 추방되며 공화정이 수립되었습니다.
제2제정기의 정치
제2제정기는 1840년 '성년 칙령 쿠데타(Golpe da Maioridade)'로 시작됩니다.
섭정 시기 동안 브라질은 여러 내전을 겪었습니다. 이에 자유당은 왕위 계승자인 페드루의 성년을 앞당기자고 제안했고, 중앙 정부의 부재가 국가 통합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이 이에 동조했습니다.
제2제정기의 정치는 두 정당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집니다.
- 자유당(Partido Liberal): 당원들은 '루지아(luzia)'라고 불렸습니다.
- 보수당(Partido Conservador): 당원들은 '사콰레마(saquarema)'라고 불렸습니다.
엄밀히 말해 두 정당 모두 노예제 유지 같은 엘리트층의 이익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사했습니다. 양당의 차이는 중앙 권력에 대한 태도에 있었는데, 자유당은 더 많은 주(州) 자치권을, 보수당은 더 강한 중앙집권을 추구했습니다.
아버지의 퇴위를 목격한 페드루 2세는 통치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1847년 브라질에 의원내각제를 도입합니다.
다만 이 제도는 영국에서 시행되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영국에서는 최다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의원이 총리가 되었지만, 브라질에서는 각료평의회 의장(총리)을 황제가 세 명의 후보 명단에서 직접 선택했습니다. 이 체계는 '역방향 의원내각제(parlamentarismo às avessas)'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또한 조정권(Poder Moderador)을 보유했으나, 실제로 사용된 경우는 몇 번에 불과했습니다.
섭정 시기(1831~1840)에 비하면 제2제정기 동안 내부 분쟁은 많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반란들을 들 수 있습니다.
- 프라이에이라 혁명: 1848~1850년, 페르남부쿠
- 무커스(Muckers) 반란: 1873~1874년, 히우그란지두술
- 케브라킬로스(Quebra-Quilos) 반란: 1872~1877년, 북동부 지역
제2제정기의 경제

이 시기 파라이바 계곡(Vale do Paraíba, 리우데자네이루)의 뛰어난 재배 조건은 커피 생산과 수출을 크게 촉진했습니다. 이후 커피 재배는 상파울루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브라질은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나라로 변모했고, 커피 수요가 워낙 커지면서 추가 노동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커피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노예제 폐지를 지향하는 어떠한 법안에도 반대했습니다. 결국 지주들은 노예 대신 이민자, 특히 이탈리아인들을 커피 농장에 들여 일시키는 방안을 지지하게 됩니다.
커피 수출 급증의 결과로 최초의 철도가 건설되었고 새로운 도시들이 탄생했습니다. 산투스항과 리우데자네이루항은 크게 번영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 브라질에 최초의 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비록 산발적이긴 했지만 이는 상당 부분 마우아 남작(Barão de Mauá)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제2제정기의 노예제 폐지 운동
이 시기는 노예제 폐지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여러 단체와 신문이 활발히 활동했으며, 노예들은 킬롱보(quilombo, 도망 노예 공동체)와 종교 협회를 통해 결집하고, 법정에서 자유를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농장주들은 노예제 폐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구매에 투자한 비용을 잃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임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이윤마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가 해방된 노예 한 명당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농장주 보상은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고, 정부는 대신 노동력 착취를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방향의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그 법률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에우제비우 지 케이로스 법(Lei Eusébio de Queirós, 1850)
- 자궁 자유법(Lei do Ventre Livre, 1871)
- 60세 노예 해방법(Lei dos Sexagenários, 1885)
- 황금률(Lei Áurea, 1888)
제2제정기의 외교 정책

파라과이 전쟁(1864~1870)
국제적으로 브라질은 인접 국가들, 특히 라플라타 지역과의 마찰에 휘말렸습니다.
히우그란지두술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제정 정부는 파라과이 독재자 솔라노 로페스(Solano López, 1827~1870)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이른바 파라과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도 참여했으며, 약 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파라과이는 패배했고 솔라노 로페스는 브라질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전쟁 후 군대는 스스로를 강화된 세력으로 여기며 국내 정치에서 더 큰 발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티 문제(Questão Christie)
같은 시기 정부는 크리스티 문제(1863~1865)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는 브라질 영토 내 영국인 관련 사건들로 촉발된 외교 분쟁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신민은 브라질 제국 내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브라질 법정의 재판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티 문제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영국 선원과 장교들 간의 다툼, 그리고 영국 프리깃함이 리우데자네이루 항의 선박 다섯 척을 침입하여 나포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관련자들이 브라질 법정에 출석해 책임을 지고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영국의 거부에 직면하자 브라질은 2년간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제2제정기의 종말과 공화국 선포
통치 기간 내내 페드루 2세는 교회, 군부, 농촌 엘리트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왕좌에 대한 국가 핵심 인물들의 지지를 하나씩 무너뜨렸습니다.
군사 쿠데타로 사태가 기운 데에는 몇 가지 사건이 작용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교황의 명령이 황제의 승인 없이는 집행될 수 없다고 요구한 이른바 '종교 문제(Questão Religiosa)'입니다.
그러나 군부의 격하와 노예제 폐지야말로 엘리트들을 가장 자극했고, 결국 황제의 퇴위로 이어졌습니다.
군부는 더 많은 인정, 임금 인상, 진급을 요구했지만 이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일부 장교들은 공화주의 이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주 엘리트 역시 노예제 폐지라는 생각 자체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국민의 참여 없이, 1889년 11월 15일 데오도루 다 폰세카(Deodoro da Fonseca) 원수에 의해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그는 브라질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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