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브라질 이민의 역사는 1850년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노예제라는 과거의 유산을 지우고 싶었던 브라질 정부는 인구의 '백인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럽 이민자들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 이민의 특징

1808년 항구 개항은 포르투갈인이 아닌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당시 여러 유럽 학술 탐사대가 브라질을 방문해 유럽에서 포르투갈 식민지를 널리 알렸으며, 특히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으로 자유직업 종사자들이 정착하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1850년 노예무역 금지 이후에는 커피 농장의 확장과 인종적 편견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유럽 이민자들의 입국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브라질 정부가 커피 농장 노동력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파트너십 제도와 정착 제도

브라질로 들어온 유럽 이민은 지역마다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상파울루에서는 이민자가 커피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는 파트너십(parceria) 제도가 시행되었고, 브라질 남부에서는 광활한 미개척지를 개간하고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정착(colonato) 제도가 적용되었습니다.

파트너십 제도

파트너십 제도에서는 이민 희망자들이 농장주에게 고용되었습니다. 농장주들은 배표, 항구에서 농장까지의 이동 비용, 숙소 비용을 대신 지불했지만, 그 대가로 이민자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빚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꿈꾸던 토지 소유는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빚을 갚기 전까지는 농장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 제도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상파울루 세나도르 베르게이루(Senador Vergueiro) 소유의 이비카파(Ibicaba) 농장에서 독일계 이민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결과 1859년 프로이센은 자국민의 브라질 이민을 금지했습니다.

정착(colonato) 제도

두 번째 단계에서 시행된 colonato 제도에서는 이민자의 도착과 정착을 주(州) 정부가 책임졌습니다. 덕분에 이민자는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월급 또는 연봉을 받을 수 있었고, 생계를 위한 작물 재배도 허용되었으며, 언제든지 농장을 떠날 자유도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이민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이었고, 많은 이민 마을이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질에 온 이민자들

포르투갈인이 도래하기 전, 오늘날의 브라질 영토에는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인디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짚어야 합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주민만이 진정한 토착민이라면, 누가 '이민자'일까요? 학술적 관례상 여기서는 자유 의지로 브라질에 도착한 사람만을 이민자로 간주합니다.

스위스인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포르투갈인 외에 브라질에 최초로 정착한 유럽 이민자는 스위스인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좁은 토지 사정 때문에 1818년부터 1819년 사이 약 2천 명이 브라질로 이주하여 '포르투갈 국왕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도착은 프리부르(Friburgo) 주와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정착지 이름도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노바 프리부르구(Nova Friburgo)'로 바뀌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이민은 19세기 내내 이어졌으며, 이주민들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산악 지대와 상파울루, 파라나, 산타카타리나, 이스피리투산투, 바이아 등 각 주에 정착했습니다.

산타카타리나에서는 여러 스위스 가문이 독일 이민자들과 함께 콜로니아 프란치스카(Colônia Francisca), 즉 오늘날의 조인빌레(Joinville)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생활 환경과 준노예제적 대우 탓에 1860년대 이후 대규모 스위스 이민은 중단되었습니다.

독일인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독일 제국의 관세 통일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었습니다.

브라질에는 이미 독일계 주민이 있었지만, 1824년 7월 25일이 독일 이민의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기록됩니다. 이날 39명의 독일 이민자가 히우그란지두술(RS) 주 상레오폴두(São Leopoldo)에 도착했습니다.

브라질 정부의 장려를 받은 그들은 주로 남부 지방과 리우데자네이루 산악 지대로 향해 경작지를 찾았고, 그곳에서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재현하려 애썼습니다.

반면 제국 정부는 그들이 브라질 국경 방어에 기여하기를 기대했고, 실제로 많은 이민자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군대에 징집되기도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히우그란지두술과 산타카타리나 거의 전역에 걸쳐 분포하며, 특히 조인빌레, 블루메나우(Blumenau), 포메로데(Pomerode) 등의 도시에서 두드러집니다.

이탈리아인

이탈리아 반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ctor Manuel II, 1820~1878) 치세였던 1870년에야 통일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이탈리아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 흐름은 무솔리니의 집권 때에야 막을 내렸습니다.

노예무역이 끝난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을 대체할 존재로 브라질행을 권유받았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증기선 여비를 대주고 임금과 주택을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게는 토지 소유권과 시민권 같은 혜택이 주어졌고, 이를 계기로 남부 지방의 카시아스두술(Caxias do Sul), 가리발디(Garibaldi), 벤투곤살베스(Bento Gonçalves) 같은 도시가 탄생했습니다.

이탈리아인의 존재감은 문화·정치적 측면에서 특히 상파울루에서 강하게 느껴집니다. 상파울루 공장들의 첫 노동자가 된 것도 바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었습니다.

브라질에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 그들은 노동자를 서로 돕기 위해 최초의 '상호부조회'를 만들었습니다.

포르투갈인

포르투갈인의 이민은 두 나라가 독립하고 갈라선 이후에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포르투갈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옛 미국 대륙의 식민지로 항해를 떠났습니다. 다른 이민자들과 달리 포르투갈인과의 관계는 훨씬 유동적이어서, 왔다가 부를 축적한 뒤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상당수는 브라질에 남아 브라질 노동자 계층과 상업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세기에는 포르투갈 이민 사회가 축구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 리우데자네이루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상파울루의 포르투게자(Portuguesa) 같은 클럽을 직접 창단하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ônio de Oliveira Salazar)의 독재 정치 역시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고향을 떠나 브라질로 향한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스페인인

숫자 기준으로 브라질에 세 번째로 많은 이민 집단은 스페인인입니다. 1880년부터 1950년 사이 약 70만 명의 스페인인이 브라질에 입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78%는 커피 농장, 그리고 이후에는 오렌지 농원에서 일하기 위해 상파울루로 향했고, 나머지는 벨루오리존치,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를 택했습니다.

스페인인들은 '카사 데 에스파냐(Casas de España)' 같은 문화 센터를 중심으로 결집해 이민자 자녀들과 브라질인들에게 음악, 무용, 스페인어를 가르쳤습니다.

일본인

세계 최대의 일본인 공동체는 브라질에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1908년 상파울루에 도착해 커피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파라나와 미나스제라이스에도 정착했으며, 브라질에 알려진 재배 기법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중동 출신 이민자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전쟁과 종교 박해를 피해 시리아, 레바논, 아르메니아, 터키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상파울루로 향했지만, 리우데자네이루, 바이아, 미나스제라이스에서도 후손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리아인과 레바논인들은 고향에서 소규모 농민이었지만, 브라질의 대농장(latifúndio) 구조 속에서는 경작할 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행상 활동에 종사하며 '행상인(mascate)'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물건 가득 담은 가방 하나로 대도시를 돌고, 철도 노선을 따라 주(州) 내륙 깊숙이까지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2세대, 즉 이민자의 자녀들은 대학에 진입해 브라질 정계, 학계, 예술계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몰락한 튀르크-오스만 제국 출신이었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브라질에서는 이 이민자들을 흔히 '터키인(turcos)'이라고 부릅니다.

그 밖의 국적들

헝가리인, 그리스인, 영국인, 미국인,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다른 국적의 이민자들도 브라질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자국의 문화와 언어적 다양성을 브라질에 가져와 이곳에 뿌리내리고 더 나은 삶을 건설했습니다.

현대의 브라질 이민

브라질 이민의 역사: 노예무역 종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2000년대 이후 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찾으면서 브라질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시민 모두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월드컵(2014)과 올림픽(2016) 같은 대형 이벤트는 이민을 부추기는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오늘날 브라질이 받아들이는 주요 이민 물결은 아이티인, 볼리비아인, 그리고 시리아인, 세네갈인, 나이지리아인 같은 전쟁 난민입니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경제·정치 위기로 인해 많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고 있으며, 특히 호라이마(Roraima) 주가 주요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상업을 목적으로 이주해 주로 도시에 정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브라질의 문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특히 아이티인과 볼리비아인의 경우 불법 입국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이주(Migration)
  • 이주의 유형
  • 브라질 문화
  • 브라질의 인구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