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셀리노 쿠비체크 드 올리베이라(Juscelino Kubitschek de Oliveira, 1902~1976)는 'JK'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은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출신의 의사이자 정치인입니다.
그는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을 지냈으며, 재임 기간은 낙관과 희망이 넘쳐흐르던 '황금 시대'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생애
주셀리노 쿠비체크는 1902년 9월 12일 미나스제라이스주 디아만티나(Diamantina)에서 태어났습니다.
검소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디아만티나 신학교에서 인문학 과정을 마쳤습니다.
1922년 벨루오리존치 연방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해 1927년 졸업했고, 이후 1931년 파리에서 외과 수술을 공부했으며 베를린 샤리테(Charité)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JK의 정치 경력
그는 미나스제라이스 연방 개입 관리였던 베네디투 발라다레스(Benedito Valadares)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1934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쿠데타로 에스타도 노부(Estado Novo) 체제가 수립되면서 의원직을 잃었습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벨루오리존치 시장을 역임하며 오스카르 니메예르(Oscar Niemeyer)의 설계로 팜풀랴(Pampulha) 단지 조성 등 중요한 도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가 실각한 뒤 치러진 선거에서 에우리쿠 가스파르 두트라(Eurico Gaspar Dutra)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JK 역시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946년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1950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로 당선됩니다. 임기 동안 그는 '에너지와 교통'이라는 두 축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CEMIG(미나스제라이스 전력공사)를 설립하고 발전소 5곳을 건설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1955년 10월 3일, 주셀리노 쿠비체크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조앙 굴라르트(João Goulart)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JK는 제툴리우 계열 정당인 사회민주당(PSD)과 브라질 노동당(PTB)의 연합을 통해 당선되었으며, 1956년 1월 31일 대통령직에 취임했습니다.
취임 후 그는 경제 정책의 구호로 “5년 안에 50년의 진보”를 내걸었습니다.
실제로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7%씩 성장했고, 1인당 성장률은 라틴아메리카 다른 국가들보다 4배 빠른 속도를 기록했습니다.
임기 종료 후 자니우 콰드로스(Jânio Quadros)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준 JK는 고이아스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그러나 1964년 군사 쿠데타와 정치인들의 권한을 박탈한 AI-1(제1차 제도법) 공포 속에서 그는 의회에서 물러났습니다.
죽음
이후 그는 카를루스 라세르다(Carlos Lacerda) 등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저명 정치인들을 규합한 광범위전선(Frente Ampla) 결성에 나섭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주셀리노 쿠비체크 드 올리베이라는 1976년 8월 22일, 상파울루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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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정부

JK 정부는 브라질 역사에서 늘 '황금 시대'로 회고됩니다.
이는 산업화를 적극 장려해 국가 경제의 진보를 이끌려던 개발주의 열풍 덕분입니다.
동시에 새 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설, 보사노바의 유행, 그리고 1958년 월드컵 첫 우승이 가져온 낙관론도 한몫했습니다.
브라질 개발을 위한 목표 계획(Plano de Metas)
JK 정부 경제 정책의 총괄 조율은 '목표 계획(Plano de Metas)'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선거 운동 기간에 발표된 이 계획은 달성해야 할 주요 목표를 에너지, 교통, 산업, 교육, 식량의 5개 분야로 묶어 제시했습니다.
값싼 석유가 넘치던 시대였기에 목표 계획은 도로 교통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 결과 2만 km에 달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대부분은 민간 국내 자본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석유 생산량은 1955년 200만 배럴에서 1960년 3,000만 배럴로 급증했습니다. 철강 생산량도 115만 톤에서 1960년 250만 톤으로 늘어났습니다.
내구 소비재 분야에서는 메르세데스-벤츠, 폭스바겐, 윌리스 오버랜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등 수많은 자동차·트럭 공장이 브라질에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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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정부 시기의 인플레이션과 외채
브라질의 근대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JK는 외국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담배 산업, 전기 장비, 화학, 제약, 전력 등 여러 분야에서 다국적 기업의 진출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외국 자본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90%에 달했고, 이러한 요인들은 인플레이션 상승에 일조하여 정부 말기에는 연 25%에 이르렀습니다.
늘어나는 외채는 해외 채권자들의 우려를 샀습니다. 이에 국제통화기금(IMF)은 브라질이 새로운 차관을 받으려면 통화 발행을 줄이는 긴축 정책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JK는 IMF의 압박을 거부하고 해당 기구와 일시적으로 결별합니다.
결국 주셀리노의 임기는 커져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물가 상승은 특히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많은 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브라질리아 건설

브라질리아의 건설은 JK 정부가 남긴 가장 눈에 잘 띄는 유산일 것입니다.
수도를 브라질 내륙으로 옮기는 일에는 막대한 인적·재정적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1960년에 문을 연 브라질리아 공사 비용 또한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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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셨나요?
- 주셀리노는 모든 자리에서 신발을 벗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양말 차림만 포착한 사진사들이 몇 번이고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 JK가 가장 좋아한 곡은 밀톤 나시멘투(Milton Nascimento)의 '페이슈-비부(Peixe-Vivo)'로,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습니다.
- 브라질 전역의 거리와 대로에 주셀리노 쿠비체크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디아만티나의 생가는 박물관으로 바뀌었으며, 브라질리아에는 대통령의 유품과 문서를 모은 JK 기념관이 있고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명언
- “나는 브라질이 하나의 국가로서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리라 믿습니다.”
- “용서는 위대함의 표징입니다. 특히 더 높은 목표가 앞에 놓여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 “낙관주의자는 실수할 수 있지만, 비관주의자는 처음부터 틀리고 있는 셈입니다...”
- “이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잊혀지도록, 역사의 심판에 맡깁시다.”
- “브라질리아의 건설, 곧 정부의 내륙 이전은 우리 영토의 공백을 실효적으로 점유한 민주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