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그당(Whig Party)은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미국 정치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로, 근대화·산업화·강력한 연방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모인 당이었습니다. 그러나 1852년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후보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장군은 민주당의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에게 크게 패배하며 사실상 최후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패배의 핵심 원인은 바로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당내 분열이었습니다.
노예제 문제로 갈라진 휘그당
휘그당은 태생적으로 이질적인 세력들의 연합체였습니다. 북부의 상공업자,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 서부의 자영농이 하나의 당 안에 공존하고 있었죠. 문제는 노예제 논쟁이 격화되면서 이 연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북부 휘그당원들은 점차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기울었고, 남부 휘그당원들은 대체로 노예제를 옹호하는 쪽에 섰습니다. 1852년 대선에서 이 균열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남부 휘그당원들은 스콧이 윌리엄 시워드(William Seward) 등 반노예제 성향의 북부 지도자들과 연계되어 있다고 의심했고, 북부 강경파는 당이 1850년 타협안과 도망노예법을 수용한 데 불만을 품었습니다. 결국 상당수 유권자가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 등 제3세력으로 이탈하며 표가 분산되었습니다.
북과 남, 양쪽에서 동시에 무너진 지지 기반
1852년 선거에서 휘그당은 북부와 남부 어느 쪽에서도 지지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북부에서는 노예제에 더욱 명확히 반대하는 세력—이후 공화당(Republican Party)으로 발전하는 반노예제 진영—의 부상에 밀려났고, 남부에서는 노예제 옹호 노선을 더욱 뚜렷하게 내세운 민주당에 지지 기반을 내주었습니다.
참고로 공화당은 1854년에야 정식으로 창당되지만, 그 뿌리는 1852년경 이미 형성되어 있던 북부의 반노예제 여론이었습니다. 결국 휘그당은 양쪽에서 모두 밀려나며 빠르게 해체되었고, 그 정치적 공백은 공화당이 채우게 되었습니다.
휘그당의 소멸이 남부에 남긴 것
휘그당의 해체는 남부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휘그당은 북부와 남부 양쪽에서 지지를 받던 몇 안 되는 전국 단위 정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이 사라지면서 두 지역 사이의 균열을 가로질러 줄 국가적 정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남부는 사실상 민주당 일당 체제로 굳어졌고, 북부에서는 반노예제 정당이 성장하며 지역 간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초당적 견제 장치가 사라진 상태에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조정될 통로를 잃었고, 이렇게 심화된 지역주의(sectionalism)는 결국 1861년 남북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주요 배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