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시불로스 차칼로토스는 현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소아시아 원정에 참전했으며, 북부 산악지대의 영웅으로서 용맹한 제3/40 에브존 연대를 지휘했다. 1940~41년에는 중동으로 건너가 여러 고난 끝에 유명한 그리스 제3산악여단의 지휘관에 올랐고, 이탈리아 리미니 전투에서 부하들과 함께 독일군을 격파하며 명예를 드높였다.
귀환했지만 받지 못한 환영
그러나 제3산악여단이 해방된 그리스로 귀환했을 때, 모든 이들에게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존경을 얻지는 못했다. 민족해방전선(EAM)과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은 실제로는 증강연대 규모에 불과했던 제3산악여단이 자신들의 그리스 내 지배력을 위협한다는 논리로 여단 해체를 요구했다.
주목할 점은 이른바 '12월 사건'이 아테네에서 "인민 시위의 유혈 진압" 이후에야 폭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태는 이미 1944년 12월 1일부터 동마케도니아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또한 분쟁이 터졌을 때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이 여전히 그리스 북부 영토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불가리아군은 1945년 5월 8일 본국이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절박했던 차칼로토스의 호소
분위기가 갈수록 어두워지고 12월 봉기가 다가오자, 차칼로토스는 그리스인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행보를 보였다. EAM의 도발에 반응해 오히려 EAM 쪽에 항의한 자기 부하들을 처벌하는 일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당시 그가 남긴 성명은 다음과 같다.
"여단은 그리스 인민의 위임을 받아 아프리카에서 전투를 벌인 뒤, 이탈리아에서 훈족(독일군)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여단은 전 세계 출신 그리스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단 하나뿐인 이념, 즉 '그리스'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여단의 군사적 지위와 방향이 의문시되고 모욕당하며, 의무를 신앙처럼 수행해야 할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구호가 전투의 구호로 사용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여단은 존재 자체조차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제해 왔습니다."
"여단에게는 철수와 도발 외에 어떠한 경우도 없었습니다. 여단의 좌우명은 통일과 영광스러운 그리스입니다. 그럼에도 여단은 지금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에 대한 여단의 의무입니다. 이 순간부터 여단은 다른 관할 아래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여단의 지휘관으로서, 비록 그럴 권한이 없음에도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병사들이 무기를 여러분에게 돌리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군인이며 임무를 수행할 것이고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서라도 형제 살육의 투쟁을 일으키지 말아 주십시오. 소수의 범죄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 곁에서 독일인, 이탈리아인, 불가리아인이 기회를 엿보며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병사들이 불가리아인에 맞서 그리스를 방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형제들이여, 병사들을 형제 살육의 투쟁으로 몰아넣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디 그들을 몰아붙이지 말아 주십시오. 이 여단은 오직 그리스의 것이며, 순수한 그리스의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당만을 압니다. 바로 '그리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1944년 12월 3일, 아테네
여단장
트라시불로스 차칼로토스 보병 대령"
내전의 영웅에서 외교관까지
차칼로토스는 이후 내전 작전에서도 뚜렷한 활약을 펼쳤다. 제1군단 사령관을 맡아 그리스 공산당(KKE)의 소위 '그리스 민주군(DSE)'에게 실질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훗날에는 육군참모총장 직위까지 역임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옛 적수였던 마르코스 바피아디스와 악수를 나누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은퇴 후에는 그리스 주유고슬라비아 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