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민간인들은 '푸일루(poilu)'로 불린 참호 속 병사들처럼 전쟁의 갈등을 직접 경험했으며,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 주인공으로서 훨씬 더 자주, 깊이 갈등에 휘말렸습니다. 그럼에도 민간인에 대한 연구는 영웅적인 병사들의 행적과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유명 전투들에 가려져 수십 년간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대전(大戰)'을 몸소 겪은 프랑스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연구자들이 나타난 것도 근래의 일입니다.
전선을 마주한 민간인들
지리적으로 보면, 전선 인근에 살았든 프랑스 남부에 거주했든 모든 민간인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을 체험했습니다. 점령의 가혹함이든 전쟁 차관(借款)이든, 적으로부터 '침략받은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적 열정 속에서 일상생활은 완전히 뒤바뀌고 파괴되었습니다.
1914년 8~9월 독일군이 마른(Marne) 방면으로 돌파하면서 수많은 프랑스인이 충격에 빠졌고,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대다수 프랑스인이 여전히 거주하던 농촌 지역에는 도시의 언론이 좀처럼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진격 앞에서 곧 수도 파리마저 위협받게 됩니다. 독일군 기동 전략의 결함으로 우익 측면에 공백이 생기면서, '마른의 택시(Taxis de la Marne)'로 불리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탄생했습니다. 파리에서 급파된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음에도 말입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ffre)는 반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했고, 독일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습니다. 랭스(Reims) 북쪽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독일군은 진지를 굳혔고, 여기서 '진지전'과 참호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은 어느새 분쟁의 한가운데 내던져졌습니다. 특히 피해가 컸던 마른과 아르덴(Ardennes)을 포함해 프랑스 11개 주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고, 어떤 민간인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어떤 이는 점령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점령지에서의 나날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점령의 영향이 가장 컸던 곳은 아르덴 주였습니다. 4년 내내 점령 상태가 지속되면서 이곳 주민들은 독일군의 학대와 처벌, 범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점령지 민간인들은 후방과 전선의 독일군 보급을 책임지는 노동에 동원되었고, 특히 밭에서, 혹은 최소한 경작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던 들판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북부와 북동부 대부분 지역 역시 전쟁 막바지 '레드 존(Red Zone)', 즉 불발탄과 포탄으로 위험한 지대로 지정되었습니다.
점령의 상징은 샤를빌메지에르(Charleville-Mézières)에 설치된 코만단투어(Kommandantur)였습니다. 이곳은 생산 할당량 배정, 전쟁에 필요한 물자 징발 등 점령 행정의 결정이 이뤄지는 신경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민간인이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고, 많은 이가 궁핍과 극도로 열악한 생활 조건 탓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반면 독일군의 포격과 만행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민간인들도 있었습니다. 가족 단위로 프랑스 남부로 떠나 사랑하는 이를 찾았으며, 국가의 지원을 받아 출발한 이들 중 일부는 1914~1918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 마을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겪은 프랑스 민간인들
점령의 희생자, '뿌리 뽑힌' 난민들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프랑스인들도 만만치 않게 고됐지만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남녀노소 민간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 차관을 통한 경제적 노력, 즉 전선을 지원할 재정을 후방에서 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애국심을 고취하고 차관 발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국가는 선전을 무기로 삼아 국민을 동원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전선에 자금을 대고 나아가 승리를 위해 금품을 바칠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전쟁 차관 포스터마다 기부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저축자들에게 그것이 전쟁 노력에 참여하는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확신시켰습니다. 전쟁 차관은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계관 속에서 제시되었고, 첫 번째 차관은 '단기전'이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전비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던 1915년 11월에 발행되었습니다.
국가 경제를 유지하려면 재정적 노력 외에도 민간인들이 들판과 공장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전쟁은 프랑스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무기 산업에 기반한 전쟁경제가 탄생했습니다. 대다수 공장은 총기와 포탄 제조 등을 위해 전환되었고, 전선으로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에게 노동이 요구되었습니다.
여성의 이미지는 프랑스인들의 의식 속에서 근본적으로 변모했습니다. 다만 이 변화가 실제 사회로 이행된 정도는 1914~1918년 프랑스 사회의 현실보다는 덜 심오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여성과 아이들은 국가의 생존을 책임지며, 지치고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들판에 나서 전선의 남성들을 지원했습니다.
민간인의 도덕적·정신적 고통
심리적인 면에서도 전쟁은 민간인에게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남편이 전선으로 떠난다는 생각은 모든 가정을 짓눌렀고, 소식과 귀환을 기다리던 마음은 대개 군인의 전사 통보와 함께 애도로 바뀌곤 했습니다. 공포와 고뇌는 전투 지역에서 먼 민간인들에게도 '대전' 기간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집과 소유물을 모두 잃은 채 전선 곁에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후방에서는 죽은 자들의 귀환이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은 매우 빠르게 제1차 세계대전의 한 주인공이 되었고, 대중적 헌신은 눈에 띄게 배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참호 속 '털투성이 병사들' 곁에 신을 그려냈고, "신은 당신 편입니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후방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군의 '호리즌트블루(horizon blue)' 제복을 입은 잔 다르크에게 경의를 표했고, 군복을 입은 프랑스 병사를 묘사하는 종교 문서가 점차 보편화되었습니다. 아베 쿠베(Abbé Coubé)의 『마른 기적 미사전(Missal du Miracle de la Marne)』에서 보듯 미사전마저 전투를 언급했으며, 최전선의 병사들은 신이 함께하는 '기독교인이자 애국적인 군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결국 민간인이 독일 점령 하에 살았든, 전선 인근에 살았든, 혹은 전쟁이 직접 닿지 않은 지역에 살았든, 그들은 재정적·사회적·심리적 영역에서 전쟁의 폭력과 공포를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모두가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극단화된 민족주의가 가져온 혹독한 고통을 짊어졌습니다. '푸일루'들이 목숨이라는 공물을 바친 '대전쟁'의 주역이었다면, 민간인들 역시 조국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이 '혈세(血稅)'를 부과당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 ALARY Eric, The Great Civil War 1914-1919, Perrin, 2013.
- 1차 세계대전 연대기, Jean-Paul Viart 저. 라루스(Larousse),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