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학, 즉 이집트 문명에 대한 과학적 연구 학문은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과 샹폴리옹의 상형문자 해독 덕분에 19세기에 비로소 탄생했습니다. 고대 동방에 대한 대중적 열정이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당시 이 문명에 대한 지식은 소수 학자들 사이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인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오늘날 카이로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고대 이집트 예술품을 발굴하고 확보한 공로 또한 그에게 돌아갑니다.
나폴레옹 원정, 이집트학의 기원
이집트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입니다. 사실 고대부터 여행자들은 이집트 문명을 탐구 대상으로 삼았고, 중세 시대에는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성경에 언급된 이집트의 장소들을 찾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19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과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전환점은 1798년부터 1801년까지 이어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었습니다. 군대에는 과학·예술위원회가 동행했고, 이들은 함께 조사를 진행해 『이집트지(Description de l'Égypte)』(1809~1822)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는 이집트에 관한 진정한 지식의 총서라 할 수 있습니다.
원정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두 나라를 긴밀히 묶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집트 지식인들은 프랑스에 대한 열망, 이른바 '프랑콜리아주의'에 사로잡혔고, 프랑스 역시 이집트에 대한 열정으로 화답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은 이집트학 발전의 핵심 열쇠인 로제타석을 손에 넣었습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하면서(1809년경) 이 학문은 대학 교육 과정에 정식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동양을 향한 유행, 오리엔탈리즘
동양 문명의 풍요로움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유행이 탄생했고, 낭만주의 작가들과 화가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829년 출간된 빅토르 위고의 시집 『동방집(Orientales)』이나 들라크루아의 여러 회화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먼 나라를 직접 찾는 사람들도 늘었는데, 그중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있었습니다. 1849년 10월 그는 작가 막심 뒤캉과 함께 유럽을 떠나 1년 남짓 동안 콘스탄티노플,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고대 기념물들은 플로베르를 완전히 매료시켰고, 그는 인상과 체험, 그리고 동양을 소재로 한 소설에 없어서는 안 될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는 1851년 초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살람보』를 집필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자리 잡기 전에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구상했습니다. 많은 동시대인과 마찬가지로 플로베르 역시 고대 동양에 특별한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눈앞에서 타락할 수밖에 없는 동양 국가들의 유럽화를 한탄했고, 바로 그렇기에 『살람보』(1862)와 『헤로디아스』(1877)의 배경을 고대에 두었습니다.
프랑스로 건너간 이집트 예술품
1831년 무함마드 알리 총독이 프랑스에 선물한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시작으로, 수많은 이집트 예술작품이 프랑스로 수입되었습니다. 룩소르 신전에서 온 이 오벨리스크는 1836년 파리에 도착했으며, 람세스 2세(기원전 1304~1236년)의 통치를 찬양하는 상형문자로 뒤덮여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 당국의 통제를 제외하면, 19세기에 이집트 예술작품의 매입을 규제하는 규정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개인 소장품과 공공 컬렉션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조각상, 오벨리스크, 각종 건축물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고, 이는 파라오의 땅 이집트의 가치와 미적 기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구자 오귀스트 마리에트
이집트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이 흐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유물 부서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집트로 파견되어 사카라 왕립 묘지에서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1858년에는 이집트 유물 관리국(Egyptian Antiquities Service)을 창설해 초대 관장이 되었고, 훗날 이집트 박물관이 된 박물관을 카이로에 설립했습니다. 마리에트는 고고학 작업에 요구되는 엄밀함과, 이집트의 경이로움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만국박람회 참여를 주관했으며, 오페라 『아이다(Aïda)』의 탄생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1867년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왕족과 명사, 부르주아, 일반 대중이 파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총 약 70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이 이집트 공원을 거니며 이색적인 경험을 만끽하고자 했습니다. 이곳에는 파라오 시대, 이슬람 시대, 근대 이집트를 형상화한 네 채의 건축물이 세워졌고, 미라 두개골이나 보석 같은 진귀한 소장품들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특히 고대 신전 재현물이 대중의 가장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재구성된 이 건물은 박물관으로도 활용되어, 이집트 건축의 변천을 한눈에 보여 주는 카이로 소재 조각품들을 소장했습니다. 1867년의 성공에 힘입어 마리에트는 이후에도 만국박람회에 꾸준히 참가했으며, 특히 1878년에는 고대 이집트 가옥을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페플럼', 오페라 아이다
1867년 전시장에 세워진 이집트 공원은 이집트 문명을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마리에트는 제작된 세트와 의상의 부정확함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학식을 예술에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의 의뢰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습니다. 1871년 카이로에서 초연이 열렸을 때는 의상 제작까지 직접 감독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상상력이 과학적 엄밀함을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신전에 새겨진 장면들을 현대 오페라 무대의 요구에 맞게 조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가수들에게 시대착오적인 수염과 콧수염을 걷어낼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이러한 처사는 카이로 초연 당시 비평가들의 조롱을 샀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를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훌륭하게 완성해 냈습니다.
그 후 수십 년간,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집트학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식을 줄 모릅니다. 2019년 라 빌레트에서 개최된 투탕카멘 특별전의 성공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더 읽어볼 자료
- 『오귀스트 마리에트: 모험가이자 이집트학자』, 아만딘 마르샬(Amandine Marshall) 지음, L'Antiquité(고대 세계), 2021.
-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이집트 탐험과 이집트학의 탄생(1798~1850)』, 페이지 에디션(Pages Éditions), 2014.
- 『1867년 만국박람회』, 프랑스국립도서관(BNF),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