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보불전쟁 말기에 파리 시민들이 수립한 운동이자 혁명적 정부를 지칭한다. 파리 포위전과 보불 휴전 협정 체결 후,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가 시민들을 무장해제하려 하자 파리인들이 봉기하여 블랑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하는 혁명 정부를 세웠다. 1871년 3월부터 5월 말까지 3개월간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 군대의 공격을 견뎌냈으나, 결국 '피의 주간(Semaine sanglante)'이라 불리는 잔혹한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파리 코뮌의 기원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두 가지 대사건이 프랑스의 얼굴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으로는 1789년 대혁명이 혁명적 전통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1871년에는 거의 세속적인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사회계급을 탄생시켰는데, 이들은 산업적 노동 조직에 종속된 노동자들을 포함했다. 19세기 동안 수많은 기업의 발전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크게 불어났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파리 인구는 약 185만 명이었으며, 그중 약 45만 명이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대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해 일했고, 그들의 노동 및 생활 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은 그들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했다. 이로 인해 불만은 수십 년간 쌓여만 갔다. 1870년경 파리에서 노동자 계급은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혁명적 운동을 통해 발언권을 얻거나 심지어 독재를 실현하기를 꿈꾸었다.

1860년부터 노동자들의 시위가 빈번해져 1864년에는 파업권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런던에서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고, 파업은 1870년까지 이어졌다. 1868년에는 정부가 집회 자유에 유리한 법률을 채택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해 정치적 사상을 전파했다. 그들은 은행, 대중교통, 광산 분야의 민간 기업 국유화를 주장했다.
왜 파리 시민들은 1871년에 봉기했는가?
보불전쟁 중이던 1870~1871년 겨울은 결정적이었다. 1870년 9월 18일 프로이센군이 수도를 포위했고, 식량 부족이 시작되었으며 1871년 1월에는 포격이 가해졌다. 대규모 군사 작전이 없자 주민들은 국민위병대(Garde nationale)에 의지해 수도를 방어할 코뮌 선거를 요구했다. 1월 28일 체결된 휴전 협정은 굶주리고 지친 민중의 분노와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2월 8일, 티에르를 포함한 부르주아 공화파 의원들이 국민의회에 입성해 파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패전의 굴욕 이후, 3월 1일 파리 시민들은 프로이센군의 개선 행진을 지켜봐야 했다. 이 군대 퍼레이드가 촉발한 분노가 사태를 급진전시켰다. 3월 초부터 파리 시민들은 아직 보르도에 머물던 국민의회에 맞섰다. 그들은 의회를 베르사유로 이전하거나 국민위병대를 무장해제하는 조치에 항의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와 벨빌에 집결한 대포를 티에르의 병력이 탈취하려 하자 시민들이 이를 저지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병사들과 형제애를 나눈 시민들은 총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장악했고, 이 과정에서 르콩트(Lecomte) 장군과 클레망 토마스(Clément Thomas) 장군이 살해되었다. 쥘 페리(Jules Ferry) 시장이 시청을 내주면서 이곳은 미래 코뮌의 심장부가 되었다. 자유를 얻은 파리 시민들은 국민위병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평의회 선거를 치렀고, 3월 22일 투표가 진행되어 6일 후 평의회가 출범했다. 의원들의 이름이 군중의 환호 속에 불려졌다.
분열된 운동
많은 코뮌파들은 외국 침공을 막기 위해 필요한 단호함으로 프랑스를 통치하려 했다. 그들은 각 코뮌의 주민들이 티에르의 권력—배신자로 간주된—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형제애와 평등의 공화국이라는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10개 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티에르는 수도를 프랑스 나머지 지역과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고, 지도자 오귀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를 감금했다.
선거 직후 평의회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90명의 의원으로 출발했으나 온건파가 사퇴하면서 빠르게 70명으로 줄었다. 나머지 의원들의 출신도 다양했다. 3분의 1은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장인, 상인, 사무원이었다. 또 다른 큰 그룹은 하층 부르주아지(기자, 의사, 엔지니어, 화가 등) 출신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차이 외에도 의원들의 정치적 이상은 조화시키기 어려웠다. 일부는 직접 행동을 옹호한 블랑키를 추종했고, 다른 이들은 시대 변화를 외면한 자코뱅파를 자처했다.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이념을 채택했다. 나머지 의원들은 스스로를 '독립 혁명파' 혹은 '급진파'라 칭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그들은 어떠한 중앙집권적 정책도 펴지 못했다. 대다수 파리 시민들은 그들의 운동을 따르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생테티엔이나 리옹 같은 몇몇 노동자 도시를 제외하면 우려만 낳았을 뿐이다. 반면 노동조합, 교육적 토론이 오가는 클럽, 언론 분야에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파리 코뮌의 진압과 실패
티에르는 즉각 반격했다. 4월 2일부터 정부군 포탄이 도시에 쏟아졌다. 코뮌파들은 전쟁 대표로 경험 없는 전직 장교 클뤼세레(Cluseret)를 임명했다. 4월 5일, 그들은 '인질령(데크레 데 오타주)'을 통과시켰다: 베르사유 정권에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남성을 체포하고, 코뮌 지지자가 처형될 때마다 인질 세 명을 처형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질적으로 이령은 집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에르에게 여론을 자극할 빌미만 제공했다. 코뮌 의원들은 변호사와 서기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새로운 정권 방어에 급급한 그들은 개혁 입법에 소극적이었다. 정교분리, 종교 학교의 세속화, 무상 교육과 사법 제도 실시, 여성 권리 신장 조치 등을 의결하는 데 그쳤다.
5월 21일 베르사유 군대가 파리에 진입하면서 '피의 주간'이라 불리는 일주일간의 투쟁이 시작되었고, 약 2만 명의 코뮌파가 목숨을 잃었다. 5월 24일 정부군이 시청을 점령하자, 코뮌파는 인질 학살과 튈르리 궁전, 회계법원, 국무원 건물 등에 방화로 맞섰다. 전투는 5월 28일 페르 라셰즈(Père-Lachaise) 묘지에서 끝났다. 최후까지 싸운 생존자들은 묘지 담장에 서서 총살당했다. 1880년부터 '코뮌의 벽(Mur des Fédérés)'은 파리 코뮌 진압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장소가 되었다.
질서가 회복된 후 3만 8천 명의 파리 시민이 체포되었고, 100여 건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다른 코뮌 지지자들은 1880년까지 망명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중에는 '붉은 처녀(La Vierge rouge)'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나키스트 활동가이자 작가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이 있었는데, 그녀는 파리 봉기에 적극 참여했다. 파리 코뮌은 19세기의 마지막 혁명이자, 당시까지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첫 시도로 기록된다.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한 보고서가 그려낸 전형적인 코뮌파의 초상
1875년, 아페르(Appert) 장군이 '1871년 봉기와 관련된 군법 재판 운영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36,309건의 사건을 검토했다고 기록하며, 다른 연구들의 분석과도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 이 보고서는 유죄 판결의 범위를 파악하고 코뮌파의 전형을 그려내는 데 도움을 준다.
봉기 기간 중 저지른 범죄와 경범죄를 심리하기 위해 설치된 군법회의는 93명에게 사형을, 251명에게 강제노역을, 1,159명에게 유배지 추방을, 3,417명에게 누벨칼레도니(Nouvelle-Calédonie) 추방을 선고했다고 한다. 또한 2,445건의 무죄 판결과 22,727건의 기각 명령이 내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형적인 코뮌파는 젊은 성인이었다: 58%가 35세 미만이었고, 49%가 미혼이었다. 그들은 국민위병대에서 복무했다. 문맹자와 반문맹자가 전체의 69%를 차지했는데, 이는 그들이 천민 계급 출신임을 보여주는 특징이다.

반면 봉기의 간부들은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장인이나 상점 노동자 같은 '노동자 엘리트' 계층에 속했다. 4분의 1은 파리 태생이었다. 대다수는 현대 산업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전통적인 직종의 노동자들이었다(야금 노동자는 13%에 불과). 79.5%가 전과가 없었다. 또한 1,051명의 여성과 651명의 아동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 중 150명은 15세 미만이었고 30%는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체포된 여성들의 71%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붉은 처녀' 루이즈 미셸은 교사였다. 소수는 매춘으로 생계를 이었다. 이러한 데이터는 베르사유파와 그들의 공포에 사로잡힌 당대 다수인이 그려낸 '코뮌당원'이나 '방화녀(pétroleuse)'라는 왜곡된 초상을 바로잡거나 무효화하는 근거가 된다.
코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공화국이 자리잡다
역설적이게도, 공화국은 파리 코뮌과 다른 봉기 운동과의 투쟁을 통해 더욱 강해졌다. 공화국은 무정부 상태에 맞서 질서를 수호할 능력을 입증했다. 1871년 7월 2일 보궐선거에서 113석 중 99석을 공화파가 차지했다. 한 달 뒤 리베(Rivet) 법이 공화정을 공식화하며, 티에르를 '행정부 수반,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칭호로 임명했다.
보수적이었던 그는 안심을 주었다: 인구 2만 명 미만의 지자체만 시장을 선출할 수 있게 했고, 징병제는 학생과 신학생에게 면제 혜택을 주어 완화했다. '영토의 해방자'로서 세 차례의 성공적인 국채 발행으로 독일에 지불할 배상금을 조기 상환했고, 1873년 8월 마지막 독일 군인이 프랑스를 떠났다. 의회에서 밀려난 티에르는 1873년 5월 24일 사임했고, 마크마옹(Marshal de Mac-Mahon) 원수가 즉각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파리 코뮌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키며 프랑스 좌파의 일부에게 참조의 시기가 되었다. '피의 주간'의 비극과 가혹한 진압은 노동운동에 의해 고양된 결속의 신화와 기억의 장소—페르 라셰즈 묘지의 연방파의 벽—에 실체를 부여했다.
- La Commune de Paris 1871 : Les acteurs, l'événement, les lieux. L'Atelier, 2021.
- Paris insurgé : La Commune de 1871, par Jacques Rougerie. Gallimard, 1995.
- La Commune de Paris (1871), par William Serman. Fayard,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