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로맨티시즘)는 18세기 말에 탄생하여 19세기에 절정에 이른 유럽의 문학·예술 사조입니다. 이 새로운 감성은 연정으로 인한 괴로움과 인간 고독의 불안을 표현했습니다. 1800년경 유럽 전역은 계몽주의 합리론에 대한 반동으로서 낭만주의 운동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약 2세기 동안 고전주의 전통이 문학과 예술을 지배해 왔습니다. 혁명 이전까지 모든 주관성을 억눌렀던 이 전통 때문에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다른 나라보다 늦게 등장했고, 더욱 격렬하게 폭발했습니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이유입니다.
고전주의의 비극적인 쇠퇴
'낭만적(romantique)'이라는 용어는 독일어 형용사 '로만티슈(romantisch)'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의미는 복합적이고 모호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소설(novel)'과 연결 짓는데, 이 단어는 처음에는 '속어(라틴어와 대비되는 언어)', 이후 '속어로 쓰인 서사물'을 의미했습니다. 독일 낭만주의자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문학을 논할 때 이를 '고전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즉, 시대에 뒤떨어진 미학에 대한 거부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선구적 낭만주의 운동은 18세기 말부터 독일과 영국에서 발전했습니다. 본격적인 낭만주의는 1800년경 게르만 문학권에서 등장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815년 이전까지 낭만주의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루소와 샤토브리앙만이 고전적 주제와 감수성을 갱신했습니다.
이러한 개별적 시도를 제외하면, 당시 문단은 장르 분리의 법칙, 고대 소재, 형식적 유희, 절제된 태도에 매여 있었습니다. 시는 숨결이 부족했고 교훈적이 되다 못해 지루해졌습니다. '모범의 세대'(17세기)의 작품을 천재성도, 독창성도 없이 모방했으며, 극작가들 역시 라신의 창백한 모방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고전주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최근의 정치적·사회적 격변 이후 극작법의 규칙들은 방향과 생기를 잃었고, 상당수 대중은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월터 스콧의 역사 소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을 열광적으로 수용했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민속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프랑스 문학 낭만주의의 성장
마담 드 스탈(1766~1817)의 두 기념비적 저작이 프랑스 문예 부흥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바로 『사회 제도와의 관계에서 고찰된 문학』(1800년경)과 『독일론』(1813)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요구를 강조하며, 미학적 상대성의 이름으로 장르 간 경계를 허물어 감수성과 개인주의를 해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왕정복고기에 한 세대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많은 작가들은 고전주의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3세기 동안 쇠퇴의 시대로 여겨져 온 중세에 대한 취향을 멸시했습니다. 1820년부터 낭만주의자들은 아르스날 도서관의 샤를 노디에 살롱에 모였고, 라마르틴의 『시적 명상록』(1820), 빅토르 위고의 『송가집』(1822), 비니의 첫 『시집』으로 빠르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182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온건했던 위고는 1827년 『크롬웰』 서문을 발표하며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문학 선언문이었습니다. 보편적 삶의 거울인 연극은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장막을 치는 예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위고는 같은 작품 안에서 숭고함과 그로테스크함을 병치할 것을 옹호했고, 삼일치의 법칙에 맞섰습니다.
고전파의 눈에 충격적이었던 그의 주장은 1830년의 격전, 즉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에르나니, 또는 카스티야의 명예』가 공연될 때 정점에 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낭만주의 시기를 1848년에서 끝짓지만, 이 운동의 정신이 몇 년 만에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전통에 대한 저항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으며, 상징주의 작가들(보들레르,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등)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 운동의 직계 후계자입니다.
알프레드 드 뮈세의 희곡은 19세기 낭만주의 연극의 대표작입니다. 가벼운 주제(연애 플롯, 기발한 인물들)와 극적 요소(주인공 중 한 명의 죽음)를 결합했습니다. 뮈세의 영웅들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데, 『마리안의 변덕』의 쾰리오나, 백성을 해방하려다 모든 이에게 경멸당하며 죽는 방탕한 청년 『로렌차치오』가 그 예입니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좌절된 희망과 불행을 표현했으며, 이 심오한 작품들은 오늘날 프랑스 연극의 가장 유명한 걸작들로 손꼽힙니다.
19세기 중반, 낭만주의적 감수성은 보들레르, 위고, 발자크가 이끄는 '사실주의' 사조의 발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미술과 음악 속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 분야에서 다비드는 1815년까지 회화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는 고대에서 영감을 얻어 정적이고 엄격한 구도를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제자 그로는 스승의 엄격함에서 빠르게 벗어나, 색채의 힘과 서사적 호흡으로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보나파르트』(1804)는 고전 미학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테오도르 제리코와 외젠 들라크루아라는 두 거장이 그로에게서 자신의 계보를 인정했습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뱃사람들』(1819)은 아카데미즘 전통에 화답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주제 자체는 순수하게 낭만주의적입니다. 화가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1816년 7월 16일, 메두사호라는 배가 침몰했고, 149명의 생존자가 뗏목에 올랐으며, 아르고스호에 의해 구조된 자는 15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물에 던져지거나 잡아먹혔습니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이 아르고스호를 발견한 순간의 극적 강도를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파리의 보수 언론은 이 그림을 체제 비판으로 간주하며 맹렬히 공격했지만, 런던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며 낭만주의 학파의 선언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주제 면에서 이 작품은 길잡이 없는 한 세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831년 들라크루아는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극적 구성, 역동성, 색채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자유와 승리를 상징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위고에서도 발견되는 동양적 소재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악 분야에서 프랑스 낭만주의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세자르 프랑크가 대표합니다.
참고 문헌
- 『프랑스와 유럽의 낭만주의』, 제라르 장장브르 지음. 포켓 출판사, 2003.
- 『낭만주의의 역사』, 테오필 고티에 지음. 더 언트레이서블, 1993.
- 『프랑스 낭만주의: 19세기 감정과 사상의 혁명에 관한 에세이』, 피에르 라세르 지음. 아셰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