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치 생활은 1789년 혁명기의 논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이는 좌우로 나뉘는 전통적인 정치적 분열을 낳았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프랑스 사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 정치 생활에는 새로운 특징이 더해졌는데, 그 특이점 중 하나가 바로 ‘섭리의 인물(Providential Man)’의 등장이다.
섭리의 인물, 군주제적 표상의 지속
나폴레옹, 아돌프 티에르, 불랑제 장군, 레몽 푸앵카레, 가스통 두메르그, 페탱 원수, 드골 장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인물은 위기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프랑스인들의 열망에 부응하며 그들의 희망을 구현했다. 이 ‘구원자’의 형상은 프랑스가 수세기 동안 절대왕정 체제하에서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정치적 권력의 신경절은 ‘지상의 신의 대리인’이자 신성한 권능을 지닌 왕의 인물에 거주했으며, 그는 프랑스 왕국의 신민을 인도했다.
이 군주제적 표상은 결국 프랑스 정치 생활 속에서 지속되고 번성했으며, 왕정에서 제정을 거쳐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치 체제의 성격과 무관하게 이어졌다. 섭리의 인물은 프랑스인들로부터 일종의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신화(사실, 표상이 단순한 발상과 상상에 속해 현실을 변형시키는 것)와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게 되었다. 프랑스 역사는 이 섭리의 인물이 매우 상이한 맥락에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나폴레옹, 전사와 입법자 사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에 대한 인식, 그의 군사적 업적과 혁명기 장군 시절의 행보는 프랑스 국민의 마음속에 ‘구원자’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 비전은 ‘긴 19세기’ 동안 ‘에피날 이미지(Images d'Épinal)’라 불리는 번성한 판화 산업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도판’들은 전통적이고 순진한 시각을 드러내며, 특정 역사적 인물과 사건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켰다. 에피날 이미지는 황제와 황군의 위대함과 힘을 대중이 수용하도록 만드는 제국 선전에 활용되었으며,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회화적 표현이 그 대표적 예다.
젊은 대위 시절, 보나파르트는 "영광을 향해 돌진하려는 젊은 대위들의 정복적 대담함"(라울 지라르데)을 구현했다. 그의 정당성은 과거나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즉각적 행동의 눈부심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관점에서 젊은 보나파르트와 1795년, 1800년 두 차례의 이탈리아 원정 승리는 그를 구원자로 신화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회화와 문학 예술에서도 이러한 이미지가 재활용되었다. 다비드 화백의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보나파르트>가 미래의 이탈리아 정복을 가리키는 모습이 그 예다. 스탕달, 발자크, 모리스 바레즈 같은 작가들도 보나파르트의 신화화에 동참했다. 바레즈는 그가 "제국을 꿈꾸는 젊은 영웅들의 청색 안색을 지닌 사색적이고 사나운 인물"이라고 썼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렇게 일종의 신성함을 얻으며 오래도록 지속될 나폴레옹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전공(戰功)이 입법자로서 황제의 중요성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요소 역시 섭리의 인물 이미지 구축에 기여했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제도적 질서의 창시자였다. 프랑스 정치인 아돌프 티에르는 제1제국의 법들에 대해 "현대 사회의 기초"라고 평했으며,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회에 "질서, 우리의 민법(시민법전), 그리고 행정 조직"을 부여했다고 덧붙였다. 입법적 행위를 통해 나폴레옹은 무용담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행정의 장기적 생명 속에 자리 잡은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러한 위업을 통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으로 프랑스인의 상상력 속에 정착했다. 이 비전은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강화되었다. 유배지 엘바 섬에서 귀환한 그는 골프 쥐앙 상륙부터 파리 입성까지 단 2주 만에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왕당파가 강한 정오 루트를 피하고, 보나파르티즘 정서가 강한 안전한 경로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전공, 입법자로서의 업적, 엘바 섬 귀환, 그리고 1821년 5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죽음은 나폴레옹 전설을 완성했다.
이 나폴레옹에 대한 애착은 최소 두 가지 중요한 사건에서 드러난다. 1840년 12월 나폴레옹 유해 봉환 당시의 진정한 대중적 환희, 그리고 1848년 12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상대의 예상을 깨고 750만 표를 얻어 당선된 것이다. 투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이 표심이 본질적으로 농촌 인구로부터 나왔음을 보여준다. 보통선거(남성)는 나폴레옹 전설이 프랑스인 정신 속에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드러냈다.
이후, 보나파르티즘 유산을 체화한 또 다른 인물이 제3공화정 초기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프랑스인의 상상력 속에 등장하니, 바로 불랑제 장군이다.
불랑제 장군: "불만 세력의 결집자"
불랑제 장군의 인기 부상은 1886년부터 1889년, 공화주의 방어법에 의한 그의 몰락까지의 기간 동안 프랑스의 경제·사회·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심각한 경제·사회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1882년 제네랄 유니온 은행을 비롯한 은행 파산으로 주가 대공황이 발생했고, 이는 프랑스 생산에 타격을 주었다. 직접적 결과는 경제 성장의 둔화와 농업·공업 부문의 깊은 위기였다. 농업은 포도나무에 해로운 필록세라 충해로, 공업은 섬유 및 야금 분야의 연쇄 도산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 경제 상황에서 외산 제품 경쟁에 맞서기 위한 보호무역 요구가 분출했다. 사회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 요구를 배경으로 1886년 1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드카즈빌 파업에서 보듯 사회적 반란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경제·사회 위기 속에서 정체성 위기가 싹텄다. 사회는 희생양을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반에 반유대주의가 대두한 시기다. 에두아르 드뤼몽이 1886년 출간한 『유대인의 프랑스』는 여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민 배척과 자국 중심주의로의 회귀 역시 이 정체성 위기와 직결된 현상으로, 이민자가 프랑스 인구가 처한 상황의 제2 희생양으로 지목되며 강한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를 낳았다.
이 위기의 절정은 정치 영역에서 나타났다. 공화파의 분열과 의회제도 및 의원들에 대한 오명(무능력, 무력함)으로 공화정은 신용을 잃었다. 1885년 12월 재선된 그레비 대통령의 사위 다니엘 윌슨이 연루된 훈장 추서 스캔들(장식 스캔들)은 이 불신을 심화시켰고, 이 사건은 1887년 10월 불랑제 장군 측 근접 신문에 의해 폭로되어 그레비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냈다.
마지막으로, 1870년 보불전쟁 패배 이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레반슈(복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교내 대대' 편성, 사격 및 체조 협회 결성 등을 통해 조국 수호 정신을 교육받으며 복수를 준비했다.
섭리의 인물, 불랑제

이러한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불랑제 장군의 인물상이 부상했다. 직업 군인인 그는 제2제국기의 전쟁, 특히 카빌리아와 인도차이나 식민지 전투에 참전했다. 프레시네 내각 출범 시 육군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공화파 장군으로서 군내 개혁을 단행했다. 르벨 소총 도입, 수염 기르기 허용 등 수많은 칙령을 내렸고,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장교들을 축출하며 군의 공화정화에 나섰다. 드카즈빌 파업 노동자 편에 서고, 1886년 6월 왕족 추방법을 엄격히 집행해 이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음은 1886년 7월 14일 열병식에서 드러났다. 그는 그레비 대통령을 제치고 대중의 "불랑제 만세" 환호를 받았다. 1887년 4월 슈나이벨레 사건(간첩 혐의)에서 그는 독일과의 복수를 주장하는 인물로 나서며 애국심과 대독 강경책을 천명했다. 이후 신내각 구성에서 배제되고 클레르몽페랑 주둔지로 좌천되어 파리와 국정에서 멀어졌다.
지지자들은 그의 '유배'를 거부하며 노래, 사진, 기념품 등을 통해 불랑제 장군의 개성을 홍보하는 격렬한 선전전을 펼쳤다. 그는 선거전에 뛰어들어 공화파 후보들을 연이어 꺾었고, 우파와 좌파의 정치인·유권자를 아우르며 당시 정치 세력의 혼란과 정체성 상실을 입증했다.
불랑제는 군인 출신으로 프랑스의 복수를 염원하며, 수사적 재능으로 소외 계층을 대변하는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를 결합한 섭리의 인물로 인식되었다. 프랑스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는 결국 공화정의 합법성, 즉 선거 절차를 고수하려 했던 점 때문에 몰락했다. 많은 지지자가 쿠데타를 원했으나 그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혼란 속에서 '공화주의 방어' 세력이 불랑제 장군을 국가 안보 위협 혐의로 기소해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그는 영국과 벨기에로 망명했다가 1891년 벨기에에서 실연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약 15만 명이 운집해 그의 엄청난 인기를 증명했으나, 그의 운동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섭리의 인물은 thus 19세기 프랑스 정치 체제의 특이성을 구성했다. 나폴레옹과 불랑제의 인물을 통해, 혁명기 구체제 제도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간직한 오랜 군주제적 기반이 재등장함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도 페탱 원수와 드골 장군 등 또 다른 섭리의 인물들이 등장할 것이다.
참고 문헌
- 라울 지라르데, 『신화와 정치적 신화학』, 푸앵 세리에,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