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주소 찾기가 모험이던 시절, 프랑스 거리 명판과 집 번호의 탄생

주소 하나 찾기가 모험이던 시절

주소 찾기가 모험이던 시절, 프랑스 거리 명판과 집 번호의 탄생오늘날 우리는 정해진 주소를 아주 간단하게 찾아갈 수 있다. 거리 이름과 집 번호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무화된 것은 1805년 반포된 법령 덕분이다. 그런데 그 법령의 입안자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다. 한때는 특정 인물을 찾아가는 일 자체가 일종의 모험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17세기 파리에서 시인 베르토(Berthaud)의 친구인 루이종(Louison) 양을 찾으려면, 주소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알리종네에 삶. 정확히는 다섯 번째 층, 카바레 드 라 카주(Cabaret de la Cage) 근처, 액자 두 개가 걸린 방, 생피에르 데지즈(Saint-Pierre des Assises) 근처!" 과연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최초의 거리 표지판

그럼에도 당시에는 거리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흔히 "몽마르트로 가는 길"이나 "세느 강으로 가는 거리" 같은 식으로 불렸다. 주소를 설명하는 방식은 더욱 우스꽝스러웠는데, 의사 벨랭(Belin)의 아들에 대한 예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라르프 거리(rue de la Harpe)에 있는 모자 장수 집 메인 플뢰리(Main Fleurie)에 기거함, 지비시에르(Gibecière) 맞은편 세 번째 방, 석궁 간판 바로 근처."

즉 거리마다 고유한 이름이 없었고, 대신 간판이나 그 거리에 사는 유명 인사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셀레스탱 거리(rue des Célestins)"가 대표적인 예다. 또는 거주민들의 출신 지역이나 공동체에 따라 "부르고뉴인 거리(rue des Bourguignons)", "브르타뉴인 거리(rue de la Bretonnerie)"처럼 불리기도 했다.

주소 찾기가 모험이던 시절, 프랑스 거리 명판과 집 번호의 탄생1728년, 파리 경찰 총감은 거리의 첫 번째 집과 마지막 집에 명판을 부착하도록 했다. "우리는 파리의 거리마다 번호를 매기고, 각 거리의 모퉁이마다 양철판을 붙여 해당 거리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 구(區)를 나타내는 문자나 숫자가 추가되었다. 상당수 주민들은 이에 만족했지만, 물론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다른 거리 이름을 고수한 것이다. 명판들은 훼손되거나 완전히 떼어지기도 했다. 행정 당국은 이를 주시하다가 1729년 7월, 명판이 떨어지거나 닳았을 경우 소유주가 이를 교체할 의무가 있다는 조례를 반포했다. "두께 1인치 반(약 4cm)의 리아(Liais) 석재 판으로, 동일한 이름과 번호를 새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막다른 골목(cul-de-sac de…)" 같은 기묘한 거리 이름들이 사라졌다.

거리 이름은 정해졌지만, 집 번호는 어떠했을까? 앞서 보았듯이 간판이 주소 역할을 했다. "그랑 피뇽(Grand Pignon)의 집" 또는 "그림이 그려진 집" 같은 식으로 불렸고, 집이 개축된 후에도 그 명칭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계속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이는 혼란을 낳았고, 사람들이 주소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1415년 무렵부터 주택에 번호가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실제로 노트르담 다리(Pont Notre-Dame) 위에 개인 주택들이 지어졌고, 1436년 11월의 협정에 따라 다리 좌우측 주택에 번호를 매기게 되었다. 당시 주소는 번호, 다리의 어느 쪽인지, 상류 쪽인지 하류 쪽인지를 함께 표기했다. 그러나 1440년 다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서 재건축이 이루어졌고, 1512년에 양쪽에 34채의 주택이 들어섰다. 각 집 문 위에는 "붉은색 또는 푸른색 바탕에 금색 로마 숫자로 된 큰 번호가 새겨졌다. 번호는 차례대로 이어지지 않고 두 계열로 나뉘어, 짝수는 한쪽 편에, 홀수는 다른 쪽 편에 배치되었다."

주민들이 꺼렸던 거리 번호 매기기

주소 찾기가 모험이던 시절, 프랑스 거리 명판과 집 번호의 탄생1726년에야 비로소 파리 시 당국은 프랑스 재무관의 감독 아래, 파리 총관세청 재무국 관리들이 마차와 짐수레 출입문에 번호를 매기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이를 생활 편의를 위한 조치가 아니라 세금 인상의 전조로 받아들였다. 1740년과 1765년에도 같은 시도가 반복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왕실 연감에 따르면 1760년에서 1775년 사이에 번호가 매겨진 집들은 경찰 감독관 한 명과 고등법원 평의원 네다섯 명의 저택 정도였다. 즉 시 당국의 요청에 응하고 모범을 보이려던 소수 인사들의 집뿐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주소는 여전히 옛 방식 그대로였다. "파피용(Papillon), 목판화 조각가, 파리 비에브르 거리(rue de Bièvre), 모베르 광장(Place Maubert) 근처, 오른쪽 첫 번째 마차 출입문을 지나 긴 통로 끝, 큰 계단 이층. 1769년!" 몇 차례 번호 매기기 시도가 있었지만, 대체로 귀족과 상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귀족과 부유한 금융가들은 늘 모범적인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주소와 번호가 하숙집이나 가게와 나란히 매겨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혁명기에 이르면 파리 시민들은 집에 번호를 매기는 일보다 훨씬 절박한 걱정거리들을 안고 있었다.

법률이 강제한 번호와 명판

마침내 1805년 2월의 법령이 집 번호 매기를 의무화했다. "동일한 거리에는 하나의 번호 체계를 적용하고, 주요 출입문에 단일 번호를 부착한다. 거리 오른편에는 짝수, 왼편에는 홀수를 매긴다. 이때 거리의 오른편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세느 강에 수직 또는 사선으로 교차하는 거리의 경우 강을 향해 걷는 보행자의 오른쪽이며, 강과 평행한 거리의 경우 강의 흐름 방향으로 걷는 보행자의 오른쪽이다."

파리 시 당국이 번호 매기를 담당했지만, 유지·보수는 소유주의 몫이었다. 소유주는 높이, 위치, 색상 등 규격을 준수한다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명판을 교체할 수 있었다. 세느 강에 수직·사선으로 교차하는 거리의 번호는 옥색 바탕에 검은색, 평행한 거리는 같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표기되었다. 이 번호 체계는 1823년 4월 각 주(department)의 도시들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명판, 즉 푸른 바탕에 흰색 숫자와 문자가 새겨진 판이 등장한 것은 1847년, 랑뷔토(Rambuteau) 남작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출처

프랑스 피토레스크(France Pittoresque) 2008년 2분기호 발췌:

- 1879년 『정치·문예 평론(Revue politique et littéraire)』

- 1888년 『파리 및 일드프랑스 역사학회 회보』

- 1901년 출간 『과거의 사생활 - 파리 잡기(Parisian varie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