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2011년의 EHEC(장출혈성대장균) 위기는 거의 잊혀져 간다. 하지만 2011년 5월부터 독일 북부를 중심으로 혈변을 동반한 설사 환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면서 당시 유럽 전역은 큰 충격과 불안에 휩싸였다. 수천 명이 감염됐고, 결국 53명이 목숨을 잃었다.
발단: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에 쇄도하는 감염 신고
2011년 5월 초, 베를린의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RKI)에는 EHEC 감염으로 인한 설사 질환 신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매년 약 1,000명이 이 세균에 감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병원체는 기존 균주보다 훨씬 공격적이라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환자들 중 일부는 극도로 심한 경과를 보였고, 이례적으로 많은 환자가 혈구 파괴와 신장 손상을 동반하는 합병증인 용혈성 요독 증후군(HUS)에 시달렸다. RKI는 사후 조사에서 감염 물결의 시작점을 5월 8일로 추정했다. 이날 니더작센주의 한 여성이 장내 세균 감염으로 발병한 것이다.
EHEC란? 독소를 만들어내는 장내 세균
EHEC는 '장출혈성 대장균(Enterohemorrhagic Escherichia coli)'의 약자로, 세포 독소를 생성하는 대장균을 의미한다. EHEC 균은 주로 오염된 음식을 통해 인체에 침투하며, 대부분의 경우 경미하거나 심한 설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 독소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감염의 결과로 용혈성 요독 증후군(HUS)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혈액 응고 장애와 적혈구 파괴를 유발하여 급성 신부전으로 진행되는 무서운 합병증이다.
감염자의 상당수가 젊은 여성
2011년 5월 들어 감염 신고는 특히 함부르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급증했다. 특이한 점은 환자 중 젊은 여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통상 EHEC은 어린이에게 더 잘 발생하기 때문이다. 5월 21일, RKI는 연방위험평가연구소(BfR)와 연방소비자보호식품안전청(BVL)에 환자 급증 사실을 통보했고, 단 하루 뒤인 5월 22일 감염 물결은 정점에 달했다. 이날만 신규 EHEC 감염 161건과 신규 HUS 환자 63건이 보고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오이·상추·토마토, EHEC 오염 용의 목록에 올라
전문가들은 혈변 설사의 원인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날고기와 생우유 같은 통상적인 용의선상은 빠르게 배제됐다. 그런데 환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감염 직전에 상추를 먹었다는 기억을 호소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토마토와 오이도 잠재적 감염원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5월 25일, 굵직한 소식이 터졌다. RKI와 BfR이 공동 성명을 통해, 특히 독일 북부 지역에서 날 토마토·오이·상추 섭취를 자제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다음 날 함부르크 위생연구소는 스페인산 오이에서 EHEC 병원체를 검출하며 수사의 실마리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오이 줄거리'는 빗나갔다.
BfR의 분석 결과, 오이에서 검출된 EHEC 병원체는 대규모 유행을 일으킨 O104:H4형과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식품이 이번 질병의 진범이었을까?
신경학적 후유증까지 겪는 중증 환자들
특히 함부르크에서 감염자는 계속 늘어났다. 일부 HUS 환자들은 심각한 신경학적 장애를 겪었지만, 특효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 수용력은 완전히 한계에 달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빠르게 번져 모든 병상이 가득 찼습니다." 전 RKI 소장 라인하르트 부르거는 당시 한자 도시 함부르크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감염은 독일 북부뿐 아니라 독일 전역과 스칸디나비아, 나아가 미국까지 확산되었다.
범인은 새싹채소, 그런데 병원체는 어디서 왔나?
주(州)와 BfR의 EHEC 수사진은 롤로 로쏘 샐러드부터 로즈메리, 새싹채소에 이르기까지 90여 종 식품의 유통 데이터를 하나하나 수집했다. 그리고 6월 5일, 두 번째 큰 전환점이 온다. 니더작센주 보건부가 물류 흐름 분석을 근거로 새싹채소 섭취 자제를 권고한 것이다. 수사진은 환자들로부터 울첸군의 한 농업회사로 이어지는 단서를 확보했다. 6월 10일, 드디어 의혹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비네뷔텔의 유기농장에서 출하된 새싹채소에서 공격적인 O104:H4형 세균이 처음으로 검출된 것이다. 이 제품 포장은 가족 구성원 두 명이 EHEC에 걸린 뒤, 한 가족이 쓰레기통에서 꺼내 살려낸 덕분에 확보될 수 있었다.
당국은 날새싹채소 섭취를 금지하고, 앞서 내렸던 오이·토마토·상추 관련 권고는 해제했다. 그러나 수많은 의문이 남았다. 무엇보다 병원체가 어떻게 새싹채소에 묻었는지, 아니면 내부로 침투했는지가 최대의 미제였다. 비료 사용 탓일까? 하수 슬러지, 오염된 음용수, 혹은 테러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하지만 수사진이 뤼네부르크 헤이스 숲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농장에서 채취한 어떤 시료에서도 병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개봉하지 않은 새싹채소 포장에서조차 EHEC 균은 끝내 검출되지 않았다.
프랑스 발생 사례가 제공한 결정적 단서
O104:H4형 병원체에 의한 감염이 프랑스에서도 발생하면서 수사진은 의심 식품의 범위를 더욱 좁히는 데 성공했다. 보르도 인근에서 발병한 사람들은 프랑스의 한 어린이 시설에서 세 종류의 씨앗으로 만든 새싹채소를 먹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BfR이 유행 사태 회고록에서 밝혔듯, 이집트산 호로팍(페누그릭) 씨앗이 감염 물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 씨앗만이 프랑스에서 섭취된 새싹 믹스와 니더작센주 원예 농장의 새싹채소 재배 믹스 양쪽 모두에서 발견된 유일한 공통 성분이었기 때문이다.
수사진은 확신하게 된다. 2008~2009년 겨울 이집트에서 생산된 페누그릭 씨앗이 독일과 프랑스 발병 사례를 잇는 연결고리였으며, 이 로트의 일부가 비네뷔텔과 프랑스 양지에서 새싹채소 생산에 사용된 것이다.
이집트산 페누그릭 씨앗, 최종 원인으로 규명
이후 상황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7월 초, EU는 이집트산 페누그릭 씨앗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위험한 병원체가 '매우 높은 확률로' 이 씨앗에 묻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 당국과 세계보건기구(WHO)마저 날새싹채소 섭취 자제를 권고했고, 7월 21일 BfR·BVL·RKI는 섭취 주의 권고를 이집트산 페누그릭 씨앗과 이를 이용한 새싹채소의 날 섭취로 한정했다.
EHEC 2,987건, HUS 855건의 기록
7월 26일, RKI는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EHEC 유행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 각 주에서 3주 동안 새로운 발병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이 집계한 총 환자 수는 3,842명으로, 이 중 EHEC 감염이 2,987건, HUS 환자가 855건이었다. 전국적으로 35명이 HUS로, 18명이 EHEC로 사망해 총 5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는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상 최대의 EHEC 유행일 뿐만 아니라, HUS 환자 수 기준으로는 당국이 '세계 최대 규모'라고 언급할 정도의 사태였다.
여전히 베일에 싸인 병원체의 근원
씨앗이 어떻게, 어디서 유행 병원체와 접촉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병원체의 근원지가 어디였는지, 동물 저장소(reservoir)가 존재하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RKI는 "O104:H4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소비자 단체 푸드워치(Foodwatch)는 EHEC 위기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단체는 2013년 "감염 사례 중 겨우 10% 정도만 추적이 가능했으며, 보고된 전체 EHEC 사례의 최소 87%는 감염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채 종결 처리되었다"고 비판했고, RKI 역시 이를 확인해 주었다.
잘못된 오이 경고, 함부르크시를 압박하다
EHEC 발병의 후폭풍은 비네뷔텔 농장의 존폐 위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잘못된 경고로 인해 오이, 상추, 토마토 등 각종 채소 판매가 순간적으로 급감하면서 수많은 농민들도 고통을 겪었다. EU 집행위원회는 유럽연합 내에서만 8억 유로 이상의 소득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함부르크시는 스페인 채소 무역업자로부터 230만 유로의 손해배상 청구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분쟁은 2017년 화해로 마무리되었고, 함부르크시는 중간 6자릿수(수십만 유로) 금액을 지급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