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렐란티아 전쟁: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최초의 대규모 내전

렐란티아 전쟁: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최초의 대규모 내전

렐란티아 전쟁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군사 분쟁 중 하나입니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전쟁은 기원전 710년에서 650년 사이에 벌어졌으며,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어느 한쪽 진영에 가담했습니다. 참여 도시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 전쟁은 '범그리스(Pan-Hellenic) 전쟁'이라 불릴 만합니다.

전쟁의 발단은 칼키스와 에레트리아가 두 도시 사이에 펼쳐진 비옥한 렐란티아 평원의 소유권을 두고 다툰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 그리스에서 비옥한 평야를 장악하는 일은 해당 도시의 생존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고대 사료 속의 렐란티아 전쟁

신뢰할 만한 사료로 인정받는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을 도시 연합 간의 충돌로 기술했습니다. 그는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의 전쟁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을 적대 진영으로 나누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만 전쟁의 정확한 연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을 기원전 705년경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 렐란티아 평원 일대의 유적이 버려졌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발견과도 부합합니다.

실제로 기원전 8세기 중반까지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식민 건설 분야에서 협력 관계였습니다. 반면 시인 테오그니스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전쟁이 있었다고 언급하지만, 이 주장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헤시오도스와 아르킬로코스도 렐란티아 전쟁을 언급했으며, 투키디데스 역시 이들의 기록을 인용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놓인 밀레투스가 에레트리아의 원조를 받았다고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밀레투스가 과거 칼키스와의 전쟁에서 에레트리아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모스는 칼키스를 지원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또한 이 전쟁을 언급하며, 클레오마코스가 이끄는 테살리아 기병대가 칼키스 편에 서서 지휘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결정적으로 기울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플루타르코스는 전쟁 중 전사한 칼키스의 통치자 암피다마스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스트라본은 저서 『지리지』에서 두 도시가 한때 우호 관계였으나 후에 전쟁 상태에 빠졌다고 적었습니다. 오랜 우의 덕분에 양군은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전해집니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전쟁은 기원전 710~705년경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에레트리아에서 발견된 전사자 매장이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되며, 마지막 매장은 기원전 69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680년경에는 에레트리아에 전사자를 기리는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과 동맹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모두 에비아(에우보이아) 섬 서해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두 도시는 릴라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원을 두고 다퉜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도시는 이 평원을 두고 충돌하기로 했을까요? 기원전 8세기 말, 그리스 여러 지역과 에비아 섬까지 가뭄이 덮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비결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충돌이 시작되었고, 전투는 주로 육상에서 벌어졌습니다. 물론 해양 도시답게 양측 모두 강력한 함대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양군의 병사들은 방패, 검, 창, 투창으로 무장한 창병으로 싸웠으며, 형편이 나은 병사들은 종 모양 청동 흉갑과 투구를 착용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원거리 무기의 사용이 금지된 후 양군은 집단 단위로 교전했는데, 아마도 판갑 장병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보다는 느슨한 대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병이 이 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최후의 전투는 적대하는 팔랑크스 대형 간의 격돌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성기의 에레트리아는 중장보병 3,000명, 기병 600명, 경장 전차 60대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에레트리아 같은 작은 도시로서는 기병 600명이라는 숫자가 놀랍도록 큰 규모입니다.

칼키스군의 규모나 구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보병은 에레트리아보다 많았지만 기병은 열세였다는 사실만 전해집니다.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이 전쟁에 어느 한쪽으로 참전했습니다. 당시 에레트리아는 에비아 섬 영토의 25%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안드로스, 티노스, 케아 섬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밀레투스는 에레트리아 편에서, 사모스는 칼키스 편에서 싸웠으며, 파르살로스 출신 테살리아인들도 칼키스를 지원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외에도 최대 40개 도시가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꼽습니다. 앞서 언급한 도시들 외에 메가라, 아이기나, 키오스, 에리트라이가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렐란티아 전쟁을 메세니아 전쟁, 그리고 아르고스-스파르타 전쟁과 연관 짓기도 하는데, 이 경우 아르고스와 아이기나는 에레트리아를, 스파르타는 칼키스를 지원한 것으로 봅니다.

헤로도토스는 사모스인들이 스파르타를 도와 메세니아인과 싸웠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모스가 칼키스를 지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전쟁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밀레투스가 스파르타의 동맹 도시와 싸운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이 시기 루트라키-페라코라 지역의 소유권을 두고 끊임없이 다퉜습니다. 코린토스는 식민 건설에서도 협력했던 칼키스와 동맹을 맺었고, 메가라는 에레트리아 편에 섰습니다. 소아시아의 에리트라이는 밀레투스의 경쟁 도시였기에 칼키스의 동맹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700년경 칼키스인들은 에레트리아의 일부였던 레프칸디를 파괴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에레트리아는 렐란티아 평원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같은 시기 밀레투스인들은 에비아 남부의 카리스토스를 약탈했는데, 카리스토스는 명백히 칼키스 측 동맹이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여러 국면을 거친 끝에 칼키스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피로스식 승리였습니다. 승자와 패자 모두 재정적으로 몰락했고, 이제 상업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두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렐란티아 평원을 두고 다시 충돌한 것으로 보입니다. 칼키스는 기원전 506년까지 이 지역을 통제하다가 아테네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90년, 에레트리아는 용감한 저항 끝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렐란티아 전쟁: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최초의 대규모 내전

고풍기 그리스 전사들의 격돌. 오른쪽에 전차가 보인다.

렐란티아 전쟁: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최초의 대규모 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