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554년, 로타리오 공작과 부텔리누스 공작이 이끄는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튀링겐족 등 게르만 부족 연합군 7만 5천 명이 포 강을 건너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섭정 나르세스(Narses) 장군은 프랑크족의 침공 소식을 접하자마자 강력한 군대를 직접 이끌고 신속히 해당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혹독한 겨울과 프랑크군의 분열
그러나 554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작전을 중단하고 각자 점령한 영토 안에서 월동에 들어갔습니다. 555년 봄, 작전이 재개되면서 프랑크군은 병력을 분할했습니다. 전염병에 시달린 로타리오의 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해 귀국을 시도했고, 상대적으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던 부텔리누스(Buthelinus)의 부대는 남진하여 이탈리아 정복을 계속했습니다.
로타리오 군의 선봉 부대는 끝내 비잔틴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했습니다. 이 부대 중 극소수의 잔여 병력만이 프랑크 땅에 도달했으며, 로타리오 본인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한편 부텔리누스는 이탈리아 영토에서 진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두 군대는 캄파니아 지방 카푸아 근교, 볼투르노 강변의 카실리눔(Casilinum)에서 격돌하게 됩니다.
결전을 앞둔 양군의 상황
부텔리누스 역시 자신의 군대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조속한 결전을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였습니다. 역사가 아가티아스(Agathias)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3만 명으로, 대다수가 보병이었습니다. 이에 맞선 나르세스의 병력은 고작 1만 8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프랑크군의 쐐기 대형
부텔리누스는 병사들에게 깊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쐐기 대형을 편성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이 무게로 비잔틴군의 중앙을 돌파해 분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르세스의 치밀한 배치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나르세스는 중앙에 중장보병 부대를 배치하고 최전열에 중무장 보병(포라쿠스)을 세웠습니다. 비잔틴 팔랑크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호플리테스 팔랑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양익을 두껍게 강화했습니다. 중장보병 뒤에는 곡사(曲射) 화살로 중장보병을 지원할 궁병 부대가 늘어섰고, 보병 뒤에는 기병 사단이 배치되었습니다.
또 다른 기병 3천 명은 나르세스가 직접 지휘하는 우익에 정렬했고, 좌익에는 기병 1천 5백 명이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기병 2천 명은 숲에 가려진 채 프랑크군 우익 후방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전투의 경과와 압도적인 결과
전투는 프랑크 보병이 비잔틴 중앙을 향해 신속히 밀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야만족들은 비잔틴 전선에 돌파구를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예비대가 투입되면서 간격은 즉시 메워졌고, 이어 비잔틴 기병의 전면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크군은 거의 포위된 상태에서 문자 그대로 궤멸당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부텔리누스가 이끈 3만 명 중 고향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단 5명뿐이었다고 합니다. 나르세스의 승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며, 이 전투를 통해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게르만 세력의 잔존 저항을 사실상 종식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