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바르셸 사건 완전정리: 독일 정계를 뒤흔든 '워터칸트게이트' 스캔들의 전말

1987년 9월 12일 토요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현직 주총리 우베 바르셸(Uwe Barschel)은 라우엔부르크의 고즈넉한 슈타인호르스트 저택(Gut Steinhorst)에서 기자들과 커피를 나누며 길고 지친 선거운동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온한 저택과 달리 함부르크에서는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이 다음 주 월요일자 표지 기사 제목으로 "바르셸의 더러운 속임수"라는 문구를 내걸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경, NDR(북독일 방송)은 CDU 소속 바르셸이 비방과 염탐 캠페인을 통해 정적이자 SPD 최고 후보인 비욘 엥홀름(Björn Engholm)에게 타격을 가하려 했다는 의혹을 처음 보도했습니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르셸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언론 담당관 라이너 파이퍼(Reiner Pfeiffer)의 진술을 "어리석은 거짓말"이라며 강하게 부인했고, 기자회견 발언 일부는 그날 저녁 TV 뉴스에 그대로 방영됩니다. 몇 시간 뒤면 투표소가 열립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유권자들은 이 폭로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엥홀름 사생활 공격 작전

영화 속 정치 스릴러 같은 이 사건의 서막은 1987년 1월, 한 해가 시작되면서 이미 열리고 있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최고 후보 비욘 엥홀름을 앞세운 SPD가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하면서, CDU는 공화국 최북단 이 주에서 치열한 선거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1950년 이후 처음으로 기민당(CDU)이 주의회 절대 다수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바르셸 총리는 자신을 도와줄 언론인을 물색했고, 악셀 슈프링거 출판사 소속 저널리스트 라이너 파이퍼가 추천됩니다.

파이퍼는 자신이 바르셸로부터 엥홀름에 대한 조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즉각 움직였습니다. 먼저 바르셸이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편지와 함께 엥홀름의 탈세 혐의를 익명으로 신고했지만, SPD 정치인의 세금 파일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2월에는 브레머하펜의 탐정기관에 엥홀름 감시를 의뢰합니다. 목표는 도전자의 동성애 성향이나 혼외 관계 등 추문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파이퍼는 엥홀름의 집에 직접 전화를 겁니다. '바그너 박사'라는 의사로 가장해 자신이 에이즈(AIDS) 감염 증거를 갖고 있다며 정치인을 몰아붙이는 것이었죠. 파이퍼는 심지어 도청 스캔들을 야당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바르셸 사무실에 설치할 도청 장치 확보까지 시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작전도 의도한 결과를 낳지 못했고, 엥홀름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납니다.

'스파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다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음모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엥홀름은 슈피겔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여러 행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언론인들에게 비밀 유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SPD 의원단 대변인 클라우스 닐리우스(Klaus Nilius) 역시 슈피겔 편집진과 접촉해 SPD 후보에 대한 공작 내용을 전달합니다. 결국 9월 7일, 함부르크의 이 뉴스 매거진은 킬(Kiel) 선거전의 더러운 속임수를 다룬 첫 번째 기사를 게재합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무너뜨린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빗대어, 북부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는 '워터칸트게이트(Waterkantgate)'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파이퍼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합니다. 9월 9일, 파이퍼는 스스로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닐리우스가 슈피겔 편집자들과 마련한 자리에서 바르셸의 미디어 담당관은 진술서를 통해 엥홀름에 대한 불법 행위들을 하나하나 설명했습니다. 그는 바르셸이 손수 쓴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를 증거로 제시하며 16만 5천마르크를 받아 챙깁니다. 철저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폭로의 세부 내용은 새어 나가, 선거 전날 전 국민이 알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슈피겔'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됩니다.

바르셸: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1987년 9월 13일의 주 선거는 바르셸에게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1983년 49% 득표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그의 CDU는 42.6%로 곤두밟았고, SPD는 45.2%를 얻으며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바르셸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9월 18일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곧 여러분께 제출할 이 진술서와 더불어, 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민들과 독일 전체 국민에게 맹세합니다. 나에 대한 혐의는 근거가 없습니다. 명예를 걸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며칠 뒤 당내 모든 지지 기반을 잃은 바르셸은 10월 2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총리직에서 사퇴합니다.

조사위원회, 바르셸의 연루 확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조사 과정에서 바르셸은 여러 증인의 증언으로 중대한 혐의를 받게 됩니다. 위원회는 1988년 2월, 최종 보고서에서 바르셸이 파이퍼의 수많은 활동을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공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동시에 여러 SPD 정치인들이 오랫동안 파이퍼로부터 정보를 받아왔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바르셸은 10월 12일 조사위원회에 증언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전인 10월 11일, 그는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재선거에서 SPD 압승

새 주정부 구성은 당장 요원했습니다. 선거 결과는 주의회 교착 상태로 이어졌습니다. CDU-FDP 연합과 SPD-SSW 의원 마이어(Meyer) 진영의 의석이 팽팽히 맞섰고, 마이어가 CDU 후보에 대한 투표를 거부하면서 재선거가 불가피해졌습니다. 그동안 바르셸의 전 부총리 헤닝 슈바르츠(Henning Schwarz, CDU)가 직무대행을 맡습니다. 1988년 5월 8일 재선거에서 SPD는 54.8%의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5월 31일 주의회는 엥홀름을 주총리로 선출합니다. 그러나 5년 후, 엥홀름은 1987년 선거운동 당시 파이퍼의 공작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사임하고 맙니다.

출처: Janine Kühl, NDR.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