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0만 명의 시신이 나치에 의해 우크라이나 미르니(Myrny) 일대의 대규모 집단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것은 극악무도한 범죄였습니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 국가사회주의자(나치)들은 동부 전선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집단 무덤을 열어 그곳에 묻힌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전쟁 포로의 시신을 발굴했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 출신 강제노동자들은 시신을 치우고, 귀중품을 찾아 불태우고, 뼈 조각을 갈아 흩뿌리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처참한 작업이 끝나면 강제노동자들마저 살해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진짜 목표는 동부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었고, 나치는 집단 무덤의 존재와 시신 파괴 작업을 아는 증인을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익명 제보로 시작된 SS 살인범 추적
막스 크라너(Max Krahner), 오토 골드앱(Otto Goldapp), 오토 드류스(Otto Drews)는 이러한 범죄에 가담해 강제노동자들을 살해한 SS 대원 중 세 명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작업을 진행해 생존자를 남기지 않았지만, 한 통의 익명 편지를 계기로 함부르크 검찰은 1966년부터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던 한 SS 대원이 옛 동료 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기꺼이 제공했고, 이에 따라 SS 장교들에 대한 재판이 1967년 10월 17일 개정되었습니다. 1968년 2월 9일, 함부르크 지방법원은 강제노동자 500명 살해 혐의에 대해 이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
자유를 약속한 뒤 가해진 죽음
1943년 12월 16일 하루에만, 이들은 폴란드 비아위스토크(Białystok) 인근에서 배기가스를 공급하도록 개조한 트럭 두 대로 강제노동자 100명을 살해했습니다. 수감자들은 명령에 따라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을 치웠고, SS 대원들은 이제 자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재판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크라너는 모든 이에게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해 침묵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고, 골드앱은 비누와 수건을 나눠주었습니다. 강제노동자들은 석방될 것이라고 믿었고, 크라너는 이를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가 수명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암환자를 속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트럭 배기가스로 질식사
강제노동자들이 트럭에 실렸을 때, 차가 너무 꽉 차서 문을 억지로 닫아야 했다고 수사 기록은 전합니다. 죄수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고 필사적으로 차벽을 두드렸고, 약 15분 후 비명은 사라졌습니다. 크라너는 회상했습니다. "문을 열자 앞쪽의 시신들이 감자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세 SS 대원은 폴란드와 벨로루시에서도 강제노동자 400명을 추가로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목에 총을 겨눠 쏘고, 노동자 숙소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강제노동자 살해에 가담한 이유를 묻자, 막스 크라너는 간단히 답했습니다. "나는 내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함부르크 아벤트블라트(Hamburger Abendblatt) 1967년 10월 19일자 재판 보도)
'손더아크치온 1005' — 체계적인 흔적 제거
세 전직 SS 요원의 범죄는 제국보안본부(RSHA)의 참조 번호를 딴 소위 '아크치온 1005(Aktion 1005)', 즉 대규모 공동 작전의 일부였습니다. 1942년 SS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는 동유럽에서 나치 절멸 정책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동부 전선의 모든 집단 묘지를 열어 시신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SS 내부 용어로 '엔터둥스아크치온(Enterdungsaktion, 발굴 작전)'이라 불린 이 작업은 최고 수준의 기밀로 유지되었습니다.
흔적 은폐의 배경에는 군사적 패배에 대한 우려와 함께, 독일의 미래 세대가 대량학살—특히 집단 무덤에서 부패해 가는 시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시신에서 나는 악취가 주변 마을로 번지고, 엄청난 파리 떼가 몰려들며 지하수가 오염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열린 첫 번째 홀로코스트 재판
함부르크 지방법원이 SS 대원 3명을 상대로 한 홀로코스트 재판 심리를 직접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946년 함부르크의 큐리오하우스(Curiohaus)에서 노이엔가메(Neuengamme) 강제수용소 관련 범죄 재판이 열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영국 군사법원이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용의자들이 재판 없이 풀려나다
1968년처럼 함부르크 지방법원이 나치 범죄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크라너, 골드앱, 드류스 재판을 위해 방대한 유죄 증거를 수집한 쿠르트 테게(Kurt Thage) 검사에게 종신형 판결은 커다란 성과였습니다. 다른 많은 소송에서는 범행에 대한 직접적 연루가 입증되지 않아, 가해자가 기껏해야 살인범이 아닌 공범으로만 유죄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쁜 것은 수사가 여러 해 동안 지연되어 피고인이 아예 재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판사들이 진상 규명에 관심이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과 국제 언론에서는 이러한 지연이 의도적인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일었습니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함부르크에서 검사로 근무하며 나치 범죄를 담당했던 우도 뢰르(Udo Löhr)는 2018년 1월 함부르크 아벤트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전후 많은 판사와 검사가 수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뢰르는 특히 바르샤바 게토를 '청소'하고 약 30만 명의 유대인을 추방한 혐의로 1975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루트비히 한(Ludwig Hahn) 재판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테게 검사는 1971년 자신의 의사와 반대로 교통국으로 전보되었습니다. 이에 12명의 검사가 이 전임 형사검사의 발령에 대해 내부적으로 항의했지만, 당시 사법부 상원의원 에른스트 하인젠(Ernst Heinsen)은 "신중한 고려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이례적인 조치를 정당화했습니다.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한 나치 가해자들
많은 나치 가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막스 크라너·오토 골드앱·오토 드류스 역시 형기를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크라너는 1977년 사면되어 1997년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골드앱은 1975년 석방된 뒤 1984년 사망했습니다. 드류스는 1973년 석방되었으나 재투옥 위협을 받고 자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