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전후(戰後) 사법사에서 가장 중요한 재판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은 1963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독일 사회는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글: 울리케 보세(Ulrike Bosse), NDR
"프랑크푸르트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층에서 재판을 시작했죠." 동시대 증인들의 기억 속에는 이렇듯 사소한 일들과 함께 그 시절이 남아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의 검사 중 한 명이었던 게르하르트 비제(Gerhard Wiese)가 떠올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환한 분위기는, 바로 위층에서 다뤄야 했던 섬뜩한 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독일의 나치 범죄 재판 중 가장 중요한 사건
1963년부터 아우슈비츠 출신 SS 경비병과 수용소 의사 22명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963년 12월 20일, 세 차례에 걸친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가운데 첫 번째 재판이 프랑크푸르트 뢰머(Römer)에서 열렸습니다. 이 재판은 전후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판 중 하나이자, 당시까지 독일에서 나치 범죄자에 대해 진행된 가장 중요한 재판이었습니다.
다른 나치 범죄 재판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특정 측면만 조명된 것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공포와 그 이면에 숨어 있던 시스템 전체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오직 살인 이야기뿐"
게르하르트 비제는 1963년 12월 20일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검사단 중 가장 어린 검사였습니다. 헤센 법무장관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수감자들에게 총을 쏜 경비원의 이름이 적힌 문서를 입수했습니다. 여기에 아우슈비츠 위원회 공동 창립자 헤르만 랑바인(Hermann Langbein)이 전쟁이 끝난 뒤 수집한 자료까지 더해졌습니다. 이것이 검찰 수사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 결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던 22명의 남성이 기소되었습니다.
비제는 기소장을 작성해야 했던 두 명의 SS 대원, 오스왈드 카두크(Oswald Kaduk)와 빌헬름 보거(Wilhelm Boger)의 담당 검사를 맡았습니다. 그는 당시 겪어야 했던 증언들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아침부터 밤까지 살인과 과실치사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평범하게 지내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죠."
잔혹행위와 고문 도구
소위 '보거 스윙(Boger-Schaukel)'을 묘사한 그림은 당시 고문 도구의 잔혹성을 보여줍니다.
카두크와 보거는 아우슈비츠에서 여러 잔혹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인물들이었습니다. 비제는 오스왈드 카두크에 대해 "사소한 위반에도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걸어찼으며, 그런 행위가 아우슈비츠에서의 그의 임무 전반에 스며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특히 빌헬름 보거의 이름을 딴 고문 방식 '보거 스윙'은 고문 도구의 잔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비제 검사의 냉철한 설명에서도 그 참혹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긴 장대였습니다. 그 위에 사람을 눕히고 구타를 계속했습니다. 그 사람이 거의 죽거나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할 때까지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피고인들
재판에 출석한 360여 명의 증인 중 절반 가량이 강제수용소 출신으로, 자신이 견뎌야 했던 일과 목격한 일들을 증언했습니다. 반면 피고인들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회피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복무한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은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SS 경비병뿐 아니라 행정 사무원, 그리고 아우슈비츠 선별 램프에서 가스실로 보낼 사람을 가리던 수용소 의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인간적 실험으로 악명 높은 수용소 의사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의 죄상 역시 1960년대 나치 범죄 관련 여러 재판을 통해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현장 검증: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1964년 12월 14일, 아우슈비츠 재판의 일환으로 첫 번째 현장 검증이 이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부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장 방문을 통해 증언의 진위가 확인되었습니다. 비제는 "그가 그것을 볼 수 있었는가? 들을 수 있었는가? 시각 테스트로 확인했고, 청각 테스트로도 확인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회사 야유회'쯤으로 여겼던 변호인들도 현장에서는 차분해지고 사려 깊어졌습니다. 비제는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압도적입니다. 내면까지 파고듭니다. 다른 방법이 없고, 피할 수도 없죠."
대중의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프리츠 바우어 법무장관이 수사를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독일인 대다수는 나치의 과거와 더 이상 연결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논의가 다시 불붙었고, 1965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던 공소시효는 우선 연기되었습니다.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결국 1970년대 후반에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젊은 세대의 눈을 뜨게 한 아우슈비츠 재판
이 재판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학교 수업에서는 매일같이 학생들이 법정을 찾았습니다. 비제 검사에 따르면 흥미로운 증인이 증언대에 섰는지, 아니면 단순히 문서가 낭독되는 날인지와 무관하게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나 조부모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이후 국가사회주의(나치) 범죄와의 씨름은 연방공화국 학생운동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명의 유죄 판결 — 그리고 무죄 판결이 남긴 아쉬움
담당 검사였던 게르하르트 비제에 따르면, 피고인 22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할 만큼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은 1965년 8월 20일에 막을 내렸습니다. 6명의 피고인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는 각기 다른 기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비제는 "물론 모든 피고인에게 유죄가 입증되리라 기대했습니다"라며 당시의 아쉬움을 털어놓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그만큼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무죄 판결에 실망한 것은 게르하르트 비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이 개별 유죄 판결을 넘어 이뤄낸 성취는 분명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실상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헤르만 랑바인(Hermann Langbein)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에도 피해자들의 증언은 있었지만, '과장된 것 아니냐'는 반응이 가능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관한 모든 보고는 과장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가 쉬웠죠."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이후에는 달랐습니다. "이 재판에 남아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