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네부르크(Lüneburg) 외곽 숲속의 명예묘지는 희생자 단체와 '뤼네부르크 역사 워크숍'의 주도로 최근 재건되었습니다. 1945년 4월부터 죽은 자들의 안식처였던 이곳은 1956년 평평하게 정리되며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나치 몰락 직전 벌어진 끔찍한 대량 학살의 흔적이 잠들어 있습니다.
1945년 4월 7일, 연합군 폭격기가 뤼네부르크 화물창고를 공격했습니다. 폭탄은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강제수용소에서 온 약 400명의 수감자들을 실은 화물 열차에도 떨어졌습니다. 살아남은 수감자 가운데 약 80명은 탈출을 시도했다가 체포되어 독일군의 감시를 받다가, 4월 11일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포로 호송을 담당하던 SS 대원 구스타프 젭센(Gustav Jepsen)은 1946년 뤼네부르크에서 열린 영국군 주관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단 세 명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변호사 출신 작가가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있습니다.
노이엔가메 위성수용소에서 가축차량으로 이송된 포로들
1945년 4월 11일은 빌헬름스하펜 '알터 반터 베크(Alter Banter Weg)' 강제수용소로의 포로 이송이 비참하게 끝난 날입니다. 4월 3일 시작된 이 수송은 가축 운반차량 4대로 구성된 열차로 진행되었습니다. 노이엔가메(Neuengamme) 강제수용소의 위성수용소였던 이곳에는 수감자 400여 명이 빽빽하게 수송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은 SS 대원 구스타프 젭센이 지휘하는 해병대 수십 명의 경호를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프랑스인이었지만, 벨기에와 네덜란드 출신 저항운동가, 헝가리 출신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노이엔가메 본소였습니다.
기차 여행의 조건은 극히 비인간적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정차하는 동안 마차는 휘발유, 식량 등 각종 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는 긴 급품 열차에 연결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열차 안의 수감자들에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연합군 폭격 이후, 탈출한 수감자 80명이 처형당하다
열차는 4월 7일 아침 뤼네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수십 명이 굶주림과 탈진으로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불과 몇 시간 후 미국 폭격기가 화물창고를 공격했고, 포로 수송 열차도 직격탄을 맞으며 또 다른 수십 명이 차량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생존자 일부는 파손된 차량에서 탈출해 도심 곳곳에 숨었지만, 대부분 다시 붙잡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화물야적장 인근 들판에 모여 있었습니다. SS 대원 젭센은 4월 9일과 10일 약 140명의 수감자를 트럭으로 베르겐-벨젠(Bergen-Belsen) 강제수용소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80명은 뤼네부르크에 남겨졌고, 다음 날 SS 대원 젭센과 해병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변호사 도르테 폰 베스턴하겐(Dörte von Westernhagen)은 기록 검토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뤼네부르크 증인들이 훗날 재판 절차에서 증언했듯, 희생자 대부분은 목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일부 수감자들은 단순히 학살당했으며, 이 사실은 훗날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전범 재판: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SS 대원 젭센뿐
"이것은 젭센 혼자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뤼네부르크 시장 요하네스 하우스힐트(Johannes Hauschild), 게슈타포 수장 프리드리히-요아힘 프라이타크(Friedrich-Joachim Freitag), 경찰 책임자 오토 뮐러(Otto Müller), 그리고 수감자들을 경호하던 병력들 사이의 거래였습니다." 폰 베스턴하겐은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법원 판결문 외에도 재판 개시 전 작성된 30명이 넘는 증인 인터뷰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뤼네부르크 출신 76세의 이 변호사는 런던 전쟁성(War Office)에서 제공받은 문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촘촘히 추적해 왔으며, 현재 이 사건을 다룬 책을 집필 중입니다. 뤼네부르크 재판 관련 방대한 문서—판결 기록만 해도 300페이지에 달합니다—에는 아직 역사 편찬에 반영되지 않은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게슈타포는 학살에 사용될 무기를 제공했고, 경찰은 가해자들이 열차에 올라 뤼네부르크를 조용히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그녀는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1946년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구스타프 젭센뿐이었습니다. 게슈타포 수장 프라이타크와 경찰 책임자 뮐러도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폰 베스턴하겐은 이번 저서를 통해 영국 판사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니더작센 기념재단 출판사 대변인 옌스 빈너(Jens Binner)에 따르면, 이 책은 내년 출간 예정입니다.
러시아 강제노동자들이 처리한 시신 매장 작업
현재 뤼네부르크에서는 1945년 4월의 비극과 함께 희생자 추모 공간도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뤼네부르크 외곽 숲속에는 4월 11일과 12일 수송 과정과 그에 따른 처형으로 숨진 모든 이들이 집합무덤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시신은 모두 244구였으며, 이를 처리하고 무덤에 묻는 일은 러시아인 강제노동자들에게 강요되었습니다. 뤼네부르크 역사 워크숍의 조사에 따르면, 시신을 현장에서 숲으로 운반하는 작업은 경찰과 시 당국이 조직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징벌 조치: NSDAP 당원들의 시신 발굴과 재매장
폰 베스턴하겐은 관계자들이 곧 도착할 영국군이 희생자들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범행이 저질러진 반년 후, 뤼네부르크의 NSDAP(나치당) 당원들은 영국군의 징벌 조치로 시신을 다시 발굴하고 관에 안치해 같은 장소에 엄중히 재매장해야 했습니다. 이후 이곳에 명예묘지가 조성되었습니다.
티어가르텐 추모 공원: 되살아난 명예묘지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 속에 이곳은 점차 잊혀갔습니다. 1956년 6줄로 늘어선 묘역들은 평평하게 정리되고 그 위에 진달래가 심어져, 거의 60년간 그 자리에서 자랐습니다.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뤼네부르크 역사 워크숍과 희생자 단체는 시 공무원들을 설득해 명예묘지 재건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5년간 이 작업이 조금씩 진행되었습니다.
전쟁 중 사망한 강제수용소 수감자 256명 가운데 156명이 아직도 티어가르텐(Tiergarten) 뤼네부르크 추모 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종전 75주년을 맞아 5월 4일에는 세계 각국 희생자 대표단이 참석하는 가운데 새 추모 공원의 공식 개관식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코로나19 위기로 문화 고문 카트린 슈멜(Katrin Schmäl)이 밝혔듯 행사는 연기되었으며 새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