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0월 10일,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바트제게베르크(Bad Segeberg)의 칼크베르크(Kalkberg)에 거대한 나치 집회장을 개장했습니다. 오늘날 이 야외 경기장은 '칼 메이 게임(Karl May Spiele)'의 성지로 불립니다.
바트제게베르크의 칼 메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아파치 족장 빈네 투(Winnetou)와 그의 피로 맺어진 형제 올드 슈터핸트(Old Shatterhand)의 이야기를 보기 위해 1952년부터 매년 수만 명의 방문객이 칼크베르크 경기장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장이 나치 시절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37년 10월 10일, 당시 독일 선전부 장관이던 요제프 괴벨스는 직접 세게베르크를 방문해 '노르드마크 축전장(Nordmark-Feierstätte)'의 개막식을 주재했습니다. 개막식을 담은 당시 뉴스 영화에는 새 원형극장을 찾은 2만 명의 관중과 환호성, 그리고 '히틀러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나치의 계획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집회장은 독일 전역에 총 400개가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결국 10개도 채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2년간의 대공사
바트제게베르크의 역사가이자 작가인 한스페터 슈파르(Hans-Peter Sparr)에 따르면, 당시 바트제게베르크와 슐레스비히 근처 하이타부(Haithabu) 사이에 부지 선정을 놓고 실질적인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시장이었던 예란(Jeran)은 초안을 즉시 베를린으로 보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보내야 했으니까요." 1934년 5월 27일 바트제게베르크에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칼크베르크의 대규모 건설 작업이 허가되었습니다.
2년 동안 제국노동청(Reichsarbeitsdienst)은 황량한 암산을 NSDAP의 선전 무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사 내내 노동자들은 뜻밖의 문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관람석 줄을 암반에 고정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칼크베르크는 사실 석고(gypsum) 산이었고, 석고는 물에 녹기 때문에 좌석은 다음 큰비가 내릴 때까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값비싼 슐레지아산 화강암을 발주했지만, 바트제게베르크시에는 비용이 남아돌았고 베를린이 약속했던 보조금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노르드마크 축전장'은 거의 사용되지 않다
경기장이 개장된 후 대규모 행사는 몇 번 열리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은 때때로 히틀러청년단이 집회와 깃발 게양식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점령국 영국이 나치 정권에 대한 승리를 축하한 것입니다.
그러나 경기장은 오랫동안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1945년 10월 6일, 전후 최대 규모의 복싱 대회 중 하나가 칼크베르크에서 열렸습니다. 스포츠 영웅 막스 슈멜링(Max Schmeling)이 심판을 맡으면서 1만 2천 명이 넘는 관중을 모았습니다. 칼크베르크 경기장은 훌륭한 장소임이 입증된 셈입니다. 이윽고 바트제게베르크 경제를 활성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곳을 어떻게 상시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1952년부터 칼크베르크에서 개최되어 온 칼 메이 게임이었습니다. 2017년, 이 야외 축제는 65주년을 맞이했습니다.